우울의 징조
몸에 물을 적시고 비누거품을 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문지른 뒤에 물로 헹구어내고 닦고 바르고 말리는 이 행위를 죽을 때까지 매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내가 이 생각을 했다는 것은 ‘우울 시즌'이 도래했다는 징조다.
매일 1~2시간씩 하는 운동보다 씻는 것이 더 까마득히 느껴진다. 그럴 때는 정말 안간힘을 쥐어짜서 씻으러 들어간다. 매일 씻어야 하는 인간의 몸을 저주하면서 말이다.
1년 전부터 샴푸와 바디워시를 놓아주었다. 도브 센서티브 바 하나로 세안을 하고 머리와 몸도 씻는다. 덕분에 짧았던 샤워시간은 더 짧아졌고 개복치 같은 피부도 안정을 찾고 얻어걸린 격이지만 어쨌든 환경까지 챙기게 되었으니 꽤나 맘에 드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리멸렬한 행위 자체가 좋아지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샤워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하루에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해내는 중이다. 나로서는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다행히 안다.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이 ‘욕실’이다. 공간에 대한 집착이 쪄는 나를 생각할 때 욕실을 끝내주게 내 취향으로 만들면 그나마 견딜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모델링 사장님이 ‘아니 왜 이렇게 욕실에 돈을 많이 쓰는 거예요??’라고 되물었을 때도 나는 내 고집대로 공사를 진행시켰었다. 그 결과 80%쯤 맘에 드는 욕실을 얻었다.
남편이 그곳에서 서서 오줌 싸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우리는 욕실을 따로 쓴다. 이 집에는 내 방도 있긴 하지만 그곳은 남편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이고 욕실은 남편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 그러니까 철저히 내 공간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욕실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처럼 여기고 서로 침범하지 않게 되었다.
서서 오줌 싸던 남편은 자신의 욕실을 애지중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샤워를 정말 미친 듯이(물론 내 기준) 오래 하는데 샤워 후에는 꼬박꼬박 욕실을 청소한다. 솔로 문질러 대는 소리가 시끄럽기 그지없어 나는 항상 속으로 비아냥 거린다. ‘참나. 나랑 욕실 쓸 때는 한 번도 청소 한 적 없는 주제에’
청소를 좋아해서 우리 집 방문자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의 상태를 유지하는 내가 욕실 청소만큼은 남편만큼 하지 않는다. 어쩌다 내 욕실을 본 남편이 ‘청소 좀 해라. 내 욕실 못 봤냐?’라고 거들먹거려도 분하지만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기 몸 씻는 것 귀찮은 여자는 아무래도 욕실 청소도 귀찮은 모양이다.
우울이 찾아와서 하기 싫은 일을 더 하기 싫은 건지 하기 싫은 일을 더 이상 꾸역꾸역 하기 싫을 때 우울이 찾아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는 오늘도 샤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