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멸종을 바란 내가

찐빵을 사면서 깨달은 것

by 윤비

토요일 오후, 찐빵을 사려고 햇빛이 내리쬐는 길가에 서 있었다. 나는 언제나 주문하기 전에 약간 긴장한다. 한 문장으로 주문을 마치는 것이 목표다. 예를 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tall 사이즈로 한잔 마시고 갈게요.’처럼.


겨드랑이 사이로 땀이 삐질 흘러나오는 게 느껴진다. 속으로 ‘찐빵, 김치, 고기만두 1개씩 포장해 주세요’라고 되뇌었다. 내 뒤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는 쉼 없이 고민했다.


뭐 살까? 찐빵? 김치? 고기만두? 아니 그냥 김치, 고기만두만 살까? 그래도 찐빵집인데 찐빵을 사야지, 음.. 그럼 김치랑 찐빵? 아니 왕만두 살까? 그럼 찐빵, 왕만두, 김치만두 살까? 아니야. 김치 빼고 고기만두 살까?


‘그냥 찐빵, 김치, 고기, 왕만두를 각각 1개씩 사라고! 제발!’


15분 동안 그들의 입에서 찐빵, 김치, 고기, 왕만두의 조합이 튀어나오는 것이 날 이토록 화나게 하다니. 아니 만두 따위가 뭐라고. 누가 뭐 종류별로 먹으면 죽인다고 했나.


그놈의 찐빵을 받자마자 주차해둔 차 쪽으로 냅다 뛰었다. 뛰면서 생각했다. 그 잠깐의 순간에도 나는 놓치지 않고 나를 열받게 하는 사람을 찾아냈구나. 내 영혼도 염창희처럼 아는 거다.


지난주 내내 무기력에 시달렸던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즐겁다는 걸 알았다. 일주일 내도록 무슨 짓을 해도 가라앉았던 기분이었다. 그들에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혹시, 나 인간이 필요한 건가? 내가? 일주일 내도록 대화한 사람이 갈비탕집 이모님과 찜빵집 사장님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네네를 연발하며 빨리 일어나고 싶어 엉덩이를 몇 번이나 들썩거리는 인간이다. 옆 창구에서 상담직원과 하하 호호 웃는 사람을 보고 멸종된 동물을 발견한 것처럼 두 눈이 동그래지는 그런 인간이다.


18년 동안(기가 막히게 18)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마저 버거웠던 인간들 틈에서 차라리 인간 멸종을 바라며 지냈다. 그 세월이 사실 인간을 좋아하는 나의 본성을 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쳤다.


이번 주 월요일에는 문방구 앞에서 뒤집힌 거북이 마냥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는 아이를 보자마자 입 밖으로 ‘귀여워’라고 내뱉는 내게 깜짝 놀랐다. 인간 멸종을 바란 나였을 때는 진저리를 치며 그 자리를 벗어났었다. 아 역시 애는 싸지르는 게 아니야 하면서. 그런데 이젠 웃음을 참고 아이를 혼내는 시늉을 하는 엄마까지 귀여웠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인류애는 원래 술 마실 때만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니 인류애가 생겼다. 그들이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내는 것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귀여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든든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도 귀여운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게 된다.


결핍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해 주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신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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