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여름은 밤호박이 싣고 왔다.
‘화장실 창가에 멍하니 서서 양치질을 한다. 시퍼렇게 물든 은행나무의 흔들림을 무의식적으로 응시한다. 저기 저편에 수박을 한가득 실은 파란 트럭이 휘릭 지나간다. 여름이 왔다. (2009.06.12.)
햇빛에 새까맣게 그을린 깡마른 여자아이가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횡단보도를 전력 질주하고 있다. 아마도 아이의 맘속에는 몇 초에 이 횡단보도를 달려갈 테다 라는 목표가 있겠지.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 땀에 젖어 얼굴에 딱 붙어버린 머리카락. 올해의 여름은 저 아이의 달리기를 타고 도착했다. (2017.07.01.)
회사 화장실에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수박 트럭을 보고 여름이 왔다고 느꼈었다. 이미 여름은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제야 실감 나는 순간. 그 뒤로는 버릇처럼 올해 여름은 어떻게 도착할지 기대하며 그 순간을 기록해 둔다.
후배의 카톡이 왔다. 밤호박 철이 되니 내 생각이 나서 한 박스 보냈단다. 후배의 사돈댁이 남해에서 밤호박 농사를 하시는데 한 번 맛보고 너무 맛있어서 주문했던 기억이 있다. 밤호박은 일반 단호박보다 밀도가 빡빡하고 입자가 부드러운 느낌이다. 그냥 쪄서 먹어도 맛있고 우유와 함께 갈아 마시면 천상의 맛이 난다. 나는 후배를 옆에 두고 제발 그렇게 먹어보라고 호들갑을 떨었었다.
후배는 밤호박을 보고 나를 떠올리고 그때의 나를 기억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고마웠다.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밤호박을 보며 서로를 기억하는 사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올해의 여름은 밤호박이 싣고 왔다.
여름이 좋다. 그래서 다른 계절보다 여름의 시작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여름이 되면 지쳐버려서 집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내지만 마음만은 이미 워터밤 현장에서 춤을 추고 있다. 당연히 실제로 그곳을 갈 생각은 0.0001%도 없다. 내가 여름을 즐기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엄마가 시장에서 사준 꽃무늬 홈 원피스를 입고 보사노바를 듣고 있어도 어디 바닷가에 누워 모히또를 마시고 있는 것 같이 즐겁다.
실제 여름에 했던 유희 중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시골 고모네 집에서 가지를 땄던 것이다. 푹푹 찌는 여름날 엄마와 나는 고모네 텃밭에서 가지를 한가득 땄다. 엄마는 크기도 모양도 제멋대로인 가지를 찜기에 쪄서 손으로 쭉쭉 찢었다. 그리곤 가지를 차갑게 식힌 후 굵게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를 한가득 넣어 무쳐냈다. 그 뒤로 우리 집 가지무침 레시피는 그것으로 정착되었다. 나는 엄마의 가지무침을 먹을 때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의 채집을 생각한다.
상상과 기억과 음악으로 여름을 보낸다. 그리고 매번 볼 때마다 탄성을 부르는 일몰의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럼 또 내년 여름에, 그다음 여름에 꺼내어 볼 수 있다. 내년 여름에 나는 올해의어떤 장면을 자주 꺼내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