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라는 단어밖에 없나
언제나 그렇듯 상대방이 먼저 물어보곤 했다. 아이가 있냐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구구절절 말하기 싫을 때는 아직 없다고만 대답했다. 그럼 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당황할 거면 애초에 그건 질문은 왜 했나 싶다.
회사 임원 중에 한 분은 결혼 인사를 하러 간 직원에게 ‘나’처럼 살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내 이름이 불쑥 나와서 후배는 놀랬다한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몸매가 망가질 까 봐 아이를 낳지 않는 것쯤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설사 내가 그렇다 한들 그것이 비난거리가 되어야 할까.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첫마디가 뭔지 아는가? 대부분 노후에 쓸쓸해서 어쩔 거냐는 탄식을 가장 많이 한다. 그들은 자식에게 경제적 지원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아플 때 자신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처리해줄 인력이 있다는 걸 조금 안도하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잠자는 듯 가지런히 누워있는 작은 쥐를 보았다. 저렇게 작은 쥐조차도 길에서 홀로 죽음을 겪었는데 왜 인간은 혼자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은 너무 고귀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당연히 있다. 죽는 것이 무섭다. 하지만 혼자 죽는 것이 비참할 거라는 생각은 접었다. 내가 떠난 내 몸을 누군가가 처리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혼자 한 달, 아니 그 이상 그대로 방치된다고 해서 그것 하나만으로 내가 내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지만 감히 홀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겪어 보지 않는 상황을 위해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식에게 부모의 죽음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깝다. 그 슬픔을 겪을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더 괴롭다.
내가 이런 인간이라 아이 때문에 얼마나 행복해할 사람인지 알았지만, 그 행복보다 불행이 더 클 거라는 것도 알았다. 오랫동안 내가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또 확인하고 확인했다. 모두 다 그렇게 살고 있고 막상 닥치면 다 잘한다는 뻔한 말은 믿을 수 없었고 나는 나를 믿었다. 그래서 겪으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믿는 구석이 없으므로 내 시체를 처리해줄 보험 같은 것을 준비해 두려고 한다. 맘 같아서는 그대로 먼지가 되고 싶지만 분명 주변인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혹시 내가 먼저 떠나도 납골당이니 수목장 같은 것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살아있었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그건 무의미하고 나는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동물이 홀로 죽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면 인간 또한 당연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것이 고귀함의 척도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물 또한 고귀하며 그들이 하찮아서 혼자 죽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사를 그저 비참하게만 바라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인간은 옆에 누가 있던 없든 간에 결국 혼자라고. 그게 종족 번식의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오히려 내가 있어서 이 세상에 쓰레기를 만드는 인간을 하나라도 덜 만들었으니 당신의 후손들이 내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