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지런한백수 Feb 05. 2022

[3 DAY] 할머니 알레르기?

3일 천하


 할머니네 도착한 지 이틀째, 첫날과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몸이 이리도 예민한 줄은 꿈에도 몰랐던 지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할머니네엔 고양이도, 내가 알레르기를 일으킬 풀과 나무도 없는데 무슨… 경우일까?


 비염인지 할머니 댁에 있는 무언가가 나를 자극해 일으킨 알레르기인지 꼬박 하루를 재채기와 콧물로 곤욕을 치렀다.

코 주변이 빨개져 얼굴은 붉어지고 눈은 나올 듯 말듯한 재채기로 인해 계속 붉어진 채로 눈물을 맺히고 있었다.


 사실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이유들은 주변에 널려있었다.

거실에 침대를 두고 생활하는 할머니가 다른 방들은 신경을 쓰지 않고 나둬 일어날 먼지 알레르기라던가 - 가장 타당성 있다.- 온도차 때문이라던가.

몸이 찬가? 그러기엔 얼죽아의 멤버로서 매일같이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터라 오늘 오후에 사 온 아이스커피가 이유일 리도 없었다.


 그저 종합적인 추측으론 ‘다른 환경과 장소에 몸이 잘 적응하지 못한다.’

웁스. 코를 훌쩍이느라 재채기하느라 바쁘다 보니 휴지로 코를 막아뒀더니 엄마가 안쓰러워 죽겠다고 고개를 피했다.

그것이 안쓰러워서인지 보기 싫어서인지는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그 또한 엄마의 감정이기에 애써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상대의 말 외에 다른 의도를 추측하지 않기이다.-



 -



 첫날 편두통에 허덕여 약을 겨우 먹었더니 저녁엔 눈이 간지러워 무슨 알레르기이지 안달이었는데 자기 전 밤, 코와 목이 간질거리는 걸 참으며 ‘망했다’ 싶었다.

그 징후들을 다 느낀 내가 대견하기로 하듯 다음 날 아침부터 바로, 코와 목에 간지러움과 콧물로 존재감을 드러내니 이리도 솔직할 수 없는 몸이다.


 더욱 재밌는 것은 오후에 점심을 먹고 역 부근에 있는 이디야 2층에 올라가 노트북을 폈는데. 온풍기를 켠 것인지 환풍기를 켠 것인지 천장에 있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게 약간은 차게 직통으로 오기 시작했다. -이번 글에선 계속해서 ‘-인지’가 반복될 것이다. 정말 이유를 모르니까.- 그래서인지 재채기와 콧물이 함께 동반됐다. 괜히 재채기 한 번 할 때,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고, 콧물을 닦아낼 때 남몰래 닦게 되었다. 덕분에 1시간 동안 커피 반만 마신 채로 카페를 나와야 했다. 요즘 같은 시국에 카페에 가는 것이 위험하지만 할머니네서 카페라도 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



 외가 식구들이 할머니를 향해 몰래 하는 말이 있다. “유통기한 3일”

할머니의 ‘좋음’ 컨디션이 딱 3일이란 소리였다.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셨을 때도 그랬고, 우리가 할머니 댁에 왔을 때도 그러했다.

첫날과 이튿날은 매우 친절하고 다 해줄 것처럼 온화했으나 셋째 날부턴 목소리가 커지고 다시 홈그라운드 버프가 일어나곤 했다.

할머니의 말들은 살짝, ‘잔소리’라 일컫기엔 좀 더 집요하고 개인적 만족감과 답답함에서 일렁이는 것이라 표현하기가 애매한데 예를 들면 이러하다.


“아가! 아가 어디 있어?”

“두부 먹지 마! 두부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왜 이게 있는데 두부를 먹어?”

“휴지는 이거 써!”


 아주 사소하지만 그녀의 생활 습관을 가족에게 권유… 강요하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을 아주 말끔히 무시한다. 그것이 86년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그녀의 판단과 믿음, 생활이라는 것엔 거짓이 없다.

다만,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순서로 먹을 건지 김치 돼지찌개가 있으면 김치만 먹고 싶을 때도 있지 않나? 그럼 고기를 안 먹는다고 뭐라 한다던가.


때때로 생각한다.

언어의 문제일까.

소리의 문제일까.



-


 그 집요함은 때때로 한 인간체의 자유를 억제하기도 하기에 나는 최대한 그를 피하려 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오면 어디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뭐했간?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서 대화를 좀 하면 누군지 궁금해한다던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행위가 질문으로 말미암아 이유가 되고 답해야 하는 행위가 되며 동시에 나에겐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을 행위의 억압이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린 동생이 할머니의 그런 성격을 꼭 빼닮았다.

다만 할머니는 할머니라서 마음껏 내지 못하는 화와 감정을 동생에겐 고이네 때때로 미안함을 준다는 것의 차이는 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성격의 사람을 곁에 둘이다 두니 문득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윤 씨랑 이 씨가 아주 날이 섰네? 응? 경아야! (*가명) 윤 씨랑 이 씨가 아주 날이 섰어”

“엄마, 엄마 나 봐봐. 엄마! 엄마아!”


 서로, 엄마가 직접 두 눈으로 각자를 보고 그에 대답을 한다고 느낄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부른다. 그럼 방 안쪽에 도피 중인 나는 남몰래 조용히 엄마를 존경한다. 나는… 나는 못해.


 그래서 웃으면서 둘이 닮았단 얘길 엄마랑 하면 엄마도 동의하는 듯 웃는다. 실제로 20년을 서로가 말할 때 굳이 대답을 하거나 정확한 리액션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들었다던가, 흥미롭지 않은 주제구나 싶어 넘기는 엄마와 나와는 달랐다. 할머니와 동생은. 그게 엄마 입장에선 어린 동생의 장점이었으나 노년 버전인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나는 조용히 생각하게 되곤 한다. 얘… 커도 이러려나? 그땐 나도 늙으니까 나한테 별 관심 없겠지? 제발.


 

 -


 다시 3일 천하로 돌아오자면,

정확히 오후 3시를 넘기 네 엄마에게 1000%의 사랑을 주던 할머니가 목소리가 커진 것은 물론이요, 휴지를 버린 모양을 뭐라 하더니 목욕하려고 튼 보일러를 어떻게 했다고 잘못했다며 한탄하고 거실 말고 다른 곳에 있다고 화를 냈다.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첫째는 생물학적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기에 커지는 것이고 둘째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맞다고 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는 정확한데 두 번째는 내 경험이다.


 할머니는 전자와 후자를 다 가지고 있기에 매일같이 목소리가 크다.

20년 인생을 외동으로 자라며 혼자 집에서 조용히 있던 내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그이기도 했다.


3일 천하가 끝이 났다. 이제 4일째 이후의 나를 걱정해야 할 때가 왔다.


부디, 아디오스.


작가의 이전글 [2 DAY] 할머니의 손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