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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지런한백수 Jun 18. 2021

노력과 결과가 맞지 않을 때


 고3 때 실기 학원을 다니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의 문장은 어리고 비문이 많으며 머리에서 상상하는 거를 표현하기에 실력이 부족하구나.


 고2때부터 있던 언니 오빠들은 20-22살 사이에서 재수, 삼수를 하며 가고 싶은 대학 하나만을 목표로 계속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단순히 첨삭을 해주는 곳이 아니라 단편 및 장편 소설을 읽고 영화 한편도 보고 직접 작품분석노트를 작성한 후 선생님에게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름의 작품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다음 습작한 것을 평가와 함께 돌려 받았는데 좋은 말을 들은 건 사실 몇 번 되지 않는다. 


 좀 는 것은 작품 분석 능력이랄까? 글은 형편없었지만 당시 성인들의 글은 문장 자체가 달랐다. 선생님이 말하는 주제와 하고 싶은 말, 그를 위해 숨긴 의미와 표현하는 능력 등은 부족할지언정 내겐 성인들의 문장이 무척이나 높아 보였다. 그래서 도전한 것은 다독이었는데 문체를 나아지게 하는데에는 확실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실기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한 살 더 먹고 실기를 앞둔 고3이 되었다고 갑자기 습작 실력이 늘거나 많이 쓴다고 실기에 떡 붙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아마 문창과와 극작과를 준비해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물론 자신이 잘 썼던 글을 시제에 맞게 요리조리 바꿔 쓸 수 있긴 하겠으나 그럴 확률은 높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으로 재수를 결심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 재수란 성적이 모자라서 대학에 못 가는 아이들만 선택하거나 혹은 고3의 ‘실패’ 마냥 여기게 되는데 나는 실기생이니까! 재수따윈 내 마음의 양식을 쌓는데 더 시간을 주는 것과 같다라는 마음으로 부모님한텐 당연한 말도 없이 속으로만 생각했다. 일단 주어진 고3 시절엔 열심히 해야 하니까.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걸 깨달은 게 27살의 지금이란 게 놀랍지만 그런 사람이었기에 배우는 걸 즐겁게 여기고 읽고 보라는 걸 읽었으며 내가 한 것만큼 성장한 것이 눈에 띄지 않으면 흠, 아직 부족하군 하면서 더 보려하고 애쓰곤 했다. 실력적인 면에서 부족하면 열심히 하는 것에서 칭찬을 받겠다.


 나는,

 나름 회피하지 않고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


 9-10월에 보는 S예대 수시 실기 1차 합격자 발표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에서 합격자 발표 명단을 확인하라는 문자가 오면 1차 합격이래! 내게 떡하니 문자가 와있었다. 그러나 그도 그렇다는 말이 있고 아니란 말이 있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들어갔더니 1차 합격이었다.


 당시 시제가 <지구 종말을 앞둔 상황>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1시간30분간 빨리 쓰기 위해 문장력은 형편없었지만 어느 지하 바에서 사람들이 기억을 지워주는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람과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것 같은 모습을 묘사했다. 기억을 지우는 기계를 설정했던 건 막상 지구 종말을 앞두고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가는 것보다 다 잊는 것이 현실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모든 감정과 미련, 삶의 여운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물론 19살 수시 때는 이런 깊이있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극적인 상황을 이끌어내고, 마지막이라는 순간에 인간의 욕망들을 뚜렷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선 주제와 이미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다만 면접을 보는데 질문들 속에서 문학과 글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은 내가 고심 끝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글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강렬하게 좋아하는 것과 몰두한 것이 없구나.' 그중 한 질문은 대본과 글의 차이였는데 질문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대답도 부족했다. 그리고 집에 대본집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희곡집과 드라마 대본집을 알라딘 중고에서 여러권을 샀다.


 수시 발표후 수능, 정시 실기까지 시간이 꽤나 길었는데 수능은 사실 재미로 봤다. 나중에 재수, 삼수 때 지겹게 보면서 그 부담의 무게가 확연히 달라지기는 했지만 모두가 연연해하던 19살의 첫 수능땐 목표를 위해 바삐 실기에 집중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해야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어떻든.



 그러나 사람에겐 무엇이든 결과가 나타나야 그를 자양분 삼아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울 수 있게 된다.



 1월인가 2월에야 지긋지긋했던 정시 실기가 끝났는데 그때 시제도 얼핏기억난다. 물론 1차 합격했기에 생각나는 것이지 재수 때 떨어졌던 주제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때 시제는 <우주선> 과 다른 단어들을 넣어서 하나의 글을 완성시키는 것이 시제였는데 나는 목욕탕을 주제로 할머니들과 한 아이에 대해 썼다. 마지막에 우주선과 같은 게 나타나 아이가 사라지는 거였나, 여운을 듬뿍 주는 걸로 마무리를 했는데 이도 합격이었다.



 1차 국어, 영어 시험을 보고 논술 글쓰기(?)를 평가하는 H학교도 논술 글쓰기가 버스를 타고 지역 관광지였나 문화유적지에 가는 것을 묘사하라는 것이어서 수원에 사는 나는 중학교 시절 매년 도보 행사를 했던 걸 떠올리며 꽤나 자세하게 썼더니 1차 합격을 했다. 2차 글쓰기와 면접에서 말아먹었지만.



 이렇게 고3 실기 실패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런 일들에도 나는 기죽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윤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자신있고 당당하게 얘기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실기전 까지 좋은 결과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는지 모른다.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는 나의 부족함이지 나의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로 이건 실패가 아닌 기회였다. 겁없는 나는 열아홉 스물에 그리 생각했다.



 재수 땐 C예대 예비를 받았지만 그해 유독 예비가 빠지지 않아 삼수를 해야했다. 삼수 때야 수능을 공부를 하고 일반 대학으로 진학을 하기로 아빠와 함께 상의하고 결정하였는데 그때도 속으론 글에 대한 욕심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간 후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글은 놓지 말자. 그것이 삼수를 하면서 정한 목표였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늘 아쉬울 때, 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


때때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후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빠는 별개로 노력-결과의 순을 '결과'와 '노력'의 순서를 바꿔 생각하며 내게 아쉬움을 어필하였지만 나는 다음의 기회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2년 넘게


 열심히 할 목표를 선택하였고 노력하였으나,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생각하고 결심하기까지 숨을 쉬이 쉬지 못했고 공원에 나가 자연의 숨을 들이 마셔야 살 것 같아서 하루에 2만보 이상은 걸어다녔다. 지쳐 잠들어야 그나마 잠을 잘 수 있었던 나날들이었다.



 다시 노력할 대상을 정해야 했다.

 변한 것은 오로지 나이였다. 그리고 현실성에 대한 고려였다.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는 스물 일곱은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찾아야 했고 현실성도 고민해야 했으며 20대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은 아닌지, 남들과 비교하여 그럴싸한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고심해야 했다.


 50대의 아빠가 내게 던져 준 미션이었다.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생각을 표현하며 살겠다는 나보다 어쩌면 더 이상적인 말들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을 완강히 밀어내지 못한 것은 모두,

 내가 스스로 '한 것'에 대한 큰 성과가 없어서였다.

 슬프게도 내가 나 자신을 믿어달라 말하지 못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결과에 스스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과가 없으면서 생긴 자신감 결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글을 다 쓰고 며칠 후 지난 노력들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한지 한달째 되던 날, 내게 성과하나 주지 않던 불어시험 결과가 발표된다며 동기가 알려왔다. 자기전에 보고 깔끔하게 잘 거야. 미련따위 없으니까.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점수 정도만 궁금했다. 빨간 숫자와 불어 단어가, 그토록 괴롭히던 점수가 드디어 내게 다가오니 유독 어려웠던 듣기와 계속해서 오르는 말하기 점수가 그동안 해온 것이 허튼 시간들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듣기가 상위 급수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웠는데 거기서 나름 점수를 얻으니 아 귀가 트였다는 그 시기의 느낌이 맞았구나! 싶으면서도 이제 이 성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토록 원하던 점수였는데 다 내려놓고서야 얻을 수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애매모호한 감정만 남았다.


친구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간결하게 대답했다.

"재수없어"


유학을 접은 걸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의외로 긴 고민없이 대답했다.

"후회는 안 할 것 같아"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이패드를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됐다는 알림을 확인했다.

지나간 것과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의 알림이 동시에 내게 울린 것이다.


"그간 네가 노력했던 게 이제야 결실로 나타난 거야. 너는 그럴 수 있는 아이네. 노력한 걸 끝까지 붙잡고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아이"


 친구의 그 말 한마디는 내가 그간 친구에게 털어놓고 쏟아내었던 '결과'의 부재에 대한 대답과 같았다. 적절한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이 한 것에 대한 결실들이 결국은 맺혔으니 그로써 너는 충분히 잘했다고. 심정이 복잡해서 격렬한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생각나는 것을 보아 그 말이 매우 고마웠나보다.


어쩌면 지금까지 고민해오고 앞으로 끊임없이 생각할 것들 사이에 현재는 없고 불확실한 미래와 이미 일어난 과거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그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마냥 흘러갈 수도 있다. 그를 그토록 혐오하였는데 그러고 있는 스스로를 다잡을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과거로 돌아가 나를 탓하며 나 자신을 갉아먹진 않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만 잠재우면 되겠구나 싶으면 의외로 간단한 문제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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