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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Jun 30. 2018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

요즘 들어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예전에는 어설프던 인공지능이 이제는 이런 것도 할 정도가 되었네”, “앞으로 이런저런 직업이 사라진다네”라며 은근 공포심을 자극하는 소식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옥스퍼드 마틴 스쿨 칼 베네딕트 프레이 교수와 마이클 오즈번 교수가 2016년 발표한 <고용의 미래: 우리의 직업은 컴퓨터화에 얼마나 민감한가?>라는 논문이다. 이들은 논문에서 "자동화와 기술 발전으로 20년 이내 현재 직업의 47%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저명한 학자들까지 나서 인공지능에 따른 일자리의 위기에 대해서 경고하고 각종 미디어가 이를 열심히 퍼 나르기 시작하자, 이제껏 인공지능에 큰 관심이 없던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향후 자신들의 일자리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2017년 닐슨 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64.2%가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거나 위협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굳이 숫자를 앞세운 조사 결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직장인 가운데 “지금 이 직업으로 10년 후에도 먹고 살 수 있을는지.”라는 고민을 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과연 이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해보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잠깐 한 걸음 물러서 상황을 조망해보자. 결국 이 이야기들에서 군더더기를 쳐내면 화두는 하나로 모인다. 앞으로 우리들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렇다. 핵심은 ‘인간의 역할’이다.


인공지능이 더 이상 소설이나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현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인간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숙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눈앞에 어려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문이란 것을 발명했다. 사회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법학을 만들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서 의학을 만들었다. 도구를 더 잘 활용하기 위해서 공학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도 있을까. 물론이다. 다만 이 학문의 성격이 뭔가 자극적이고 화끈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담백한 편이다 보니, 그동안은 사람들이 바로 옆에 두고도 그 존재감을 잊고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 학문의 이름은 바로 인문학이다.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어떤 고정관념이 있다. 생산적인 일과 관련이 없으며, 그러다 보니 돈 버는 데는 하등 도움도 안되고, 뭔가 감성적인 것에만 치우쳐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그렇다. 즉 인문학은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세상의 상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에서 영감을 얻은 예를 들어보겠다. 컴퓨터에서 V3같은 백신 프로그램이 의학이면 파일 탐색기는 인문학이다. 인터넷에서 네이버 계산기가 공학이면 구글은 인문학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쓰고 인터넷을 할 때, 파일 탐색기와 구글 만큼 빈번하게 활용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인문학은 결코 비실용적이지 않다. 인문학은 그 어떤 학문 못지않게 실용적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의 저자 조지 앤더스도 이 점을 강조한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출신으로 각 분야의 수많은 사람과 인터뷰를 해온 그는 “첨단기술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인문학적 감각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문학이 “아무것도 훈련시키지 않지만 모든 것을 준비시킨다.”며, 인문학이야말로 공학이나 경영학 같은 소위 실용 학문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줘도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아닐까 한다. 이는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의 길잡이로서의 인문학의 기능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인문학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다음의 3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인습타파 (因習打破)


과거로부터 내려온 틀에 박힌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인습타파다. 예컨대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차별과 불평등을 개선하며,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는 것.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 혹은 “남들도 다 그러던데?”라는 근거 아닌 근거로 온갖 무지몽매한 일들이 행해져 온 관행을 중단하는 것. 그것이 인습타파의 인문학이다.


둘째, 역지사지 (易地思之)


남의 관점에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것이 역지사지다. 더 나아가 소통을 통해 상호 불신과 무관심을 해소하는 것. 남과 내가 서 있는 입장의 차이점을 생각해보고, 어쩌면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의 인문학이다.


셋째, 자아성찰 (自我省察)


인습타파와 역지사지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자아성찰이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인간 각자가 이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자아성찰의 인문학이다.


이 세 가지는, 말하자면 세 가지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남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관점. 이러한 세 가지 관점을 새롭게 하는 것. 그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인문학 공부의 목표이자 가치다.


처음의 인공지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공교롭게도 방금 말한 이 세 가지 관점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왜 그럴까.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한다. 프로그램(Program)이라는 말 자체가 미리(Pro) 써(Gram) 둔다는 의미다. 미리 쓰여 있기에 태생적으로 새로운 관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요즘 인공지능의 주요 화두인 딥 러닝도 다르지 않다. 딥 러닝의 기본 개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데이터를 때려 부어서 미리 정해진 규칙을 조금씩 개선해가며 최적의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 메타 추론이라고도 한다. 규칙을 개선한다고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개선조차도 기존의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즉,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서 최선의 결과를 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능력을 배양하는 유일한 학문인 인문학은 그 중요성이 점차 커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기계와의 경쟁을 거치면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내어줄수록, 인문학은 인간이 그들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으로서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입증할 것이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2018/06/30/%ec%99%9c-%ec%9d%b8%eb%ac%b8%ed%95%99%ec%a0%81-%ea%b0%90%ea%b0%81%ec%9d%b8%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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