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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Jun 24. 2023

감사의 재발견

국제신문 6월 23일 기고글

요즘 주말을 앞두고 부산역으로 향한다. 아내의 서울 발령으로 당분간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과 서울, 어디에서 주말을 보내든 토·일요일 중 하루는 딸아이와 도서관에 간다. 주중에 함께 놀지 못하는 딸을 향한 미안함도 있지만, 한 주 동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에도 여느 때처럼 늦은 아침을 먹고 딸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 가던 도서관이 8월까지 공사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조금 멀리 떨어진 새로운 도서관을 찾았다. 홈페이지에서 보니 2021년 새로 문을 열었다고 하던데, 실제로도 무척 깨끗하고 쾌적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주말에 도서관,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 도서관에 가면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부모들이 아이 손에 책을 들려 앉혀 놓고는 정작 자신은 옆에서 휴대전화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반전은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숙이면 어김없이 내 손에도 휴대전화가 들려져 있다는 사실. 도서관에 들어온 지 서너 시간쯤 지났을 때, 딸아이가 책을 빌려서 집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원래 다니던 도서관은 교육청 소속이고 새로 간 곳은 구립 도서관이라서 기존 회원증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부산 사람이라 서울의 구립 도서관에 정회원 가입을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집에 가져갈 책을 들고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무척 난감했다.

그때 한 직원이 등장해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선한 인상의 여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마치 자기 일처럼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한 끝에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전국 도서관에서 공통으로 쓸 수 있는 책이음 회원증으로 도서 대출 자격을 얻은 것이다. 딸아이가 빌리고 싶어 하던 책도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나는 그 직원에게 거듭 고맙다고 하면서 딸아이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때 직원의 목에 걸려 있던 공무원증이 눈에 들어왔다. ‘아, 주말 당직 중이구나’. 그 순간,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서 구청 홈페이지의 참여 게시판에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감사의 글을 남겼다. 나는 그런 글 하나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공무원들에게 뜻밖의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며칠 뒤 소통 담당 부서에서 내가 올린 글을 전해 받고 어깨가 으쓱할 그 직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글로 행복감을 느낀 게 비단 그 직원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타인의 호의에 나름의 보답을 한 행동에 대한 뿌듯함을 느꼈다. 구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남긴 감사의 글 덕분에 나도 그 직원 못지않은 행복감을 만끽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에 ‘감사’는 그렇게 인기 있는 감정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거기에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경험칙까지 더해지면 무례한 태도가 유리하다고 여기게 된다. 한편 무례함에 계속 노출되는 사람들은 으레 방어적으로 되기 쉽다. 이것은 현실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동네 소아청소년과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이 문 열기 전부터 미리 가서 줄을 서야 하는 이른바 ‘오픈런’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마다 대학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를 지원하는 전공의도 급감하고 있어 앞으로가 더 문제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기피하는 배경에는 의료 수가와 함께 일부 무례한 부모들에게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진료 중에 아이가 조금 울기만 해도 동영상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이나 맘카페에 올리고 조리돌림을 하는 일도 적잖다고 한다. 아이 보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가혹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나머지 원래 그 일을 시작한 의미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이와 진료실을 나서면서 의사에게 전하는 “고맙습니다” 한 마디가 다음 달 병원 문을 닫으려던 결정을 되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중에 아이가 40도까지 열이 났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따지지 않더라도, 무언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준 타인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일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저마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행복한 삶의 모습이 있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이라는 것에는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감사’가 아닌가 한다. ‘감사’가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인 이유다.


이 글은 2023년 6월 23일 국제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의사이자 작가로서 건강, 인문학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에 꾸준하게 기고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고 의뢰를 원하시는 매체의 관계자는 여기에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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