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영국에서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주행 방향이 반대라 정신이 없던 와중에 차선을 변경하려고 했다. 사이드 미러로 뒤를 살피는데, 옆 차선에서 다가오던 차가 나를 향해 상향등을 깜박였다. ‘무리하지 말고 저 차를 먼저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줄였는데, 그 차는 오히려 더 천천히 달렸다. 알고 보니 그런 상황에서 상향등은 ‘먼저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이는 그 운전자가 특별히 친절해서가 아니라, 영국 도로에서 흔히 통용되는 일종의 언어였다. 또 다른 예로, 번잡한 도로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하면 운전자가 상향등을 깜박이며 먼저 건너가라고 신호를 보낸다. 상향등이 도로에서 기분 나쁠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배려의 신호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영국을 선진국의 대표적인 나라로 꼽는다. 과학, 민주주의, 법치, 예술, 문학… 그리고 영어까지. 우리가 오늘날 ‘서구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상당수가 영국에서 시작되거나 발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영국을 선진국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러한 학문적, 문화적, 경제적 성취 못지않게 그 나라 사람들의 성숙한 시민 의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상향등을 상대방에게 ‘먼저 가라’는 의미로 쓸 줄 아는 배려심 말이다.
한편,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나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부분도 있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유·무형의 자산들이 과연 문명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런던에서의 1년은 문화유산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간 특별한 시간이었다. 집에서 몇 분 거리에는 대영박물관이 있었고, 그곳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자취를 마주할 때마다 경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유물들의 찬란함 뒤에 정복과 제국주의라는 어두운 역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영박물관의 1번 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유리관에 전시된 한스 슬론 경의 흉상과 그 유명한 노예선 그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마치 이 박물관의 유물들이 제국의 전리품이자 권력의 상징임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이집트 신전에서 억지로 떼어내다가 커다란 구멍이 뚫린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엘긴 마블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명분으로 그 자리에 있지만, 실제로는 야만적인 문화 파괴 행위의 증거였다. 이러한 유물들을 약탈하며 본래 유적을 파괴한 행위는 2001년 탈레반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의 저자 수바드라 다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핵심 가치들이 가진 위선과 모순을 폭로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과학사와 철학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저자는, 과학적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역사가 오늘날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학자다. 그녀는 현대 사회의 핵심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권력 구조를 탐구한다. 과학, 교육, 시간, 글 등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들이 사실 서구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고 억압의 도구가 되었는지 밝힌다.
이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문명적 가치들이 사실은 특정 권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과학의 합리성이나 교육의 중요성 등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이 서구의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시간은 돈이다’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생산성 논리에 기반해 형성된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시간을 끊임없이 쪼개고 관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그로 인해 이득을 보았는지를 살피는 과정에서 독자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편파적인지 깨닫게 된다.
책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인 서구적 가치들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지 보여주며, 이를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과학을 독점한 이들, 제국주의의 비전을 반영하는 고전, 서구 중심의 역사관 등은 모두 권력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 또한 그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한국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미국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한국 사회는 서구의 문물을 선진 문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마저 서구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가치들이 사실은 역사를 왜곡하고 억압의 도구로 기능해왔다는 저자의 통찰이었다. 우리의 일상과 사고방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이러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떤 역사책을 읽어도 진정한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저자의 지적은 강렬했다. 결국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힘을 되찾도록 돕는 안내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고, 그 너머의 진실을 탐구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이며, 새로운 관점을 얻는 과정이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준다.
저자는 배려와 공존이 문명의 시작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며,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와 학생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한 학생이 문명의 첫 번째 신호가 무엇인지 묻자, 마거릿은 부러진 다리가 치유된 고고학적 사례를 언급했다. 동물에게 부러진 다리는 생존을 위협하는 큰 문제지만, 치유된 부러진 다리의 흔적은 서로를 돌보는 사회의 증거이며,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시작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라고 설명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대영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문화유산은 비문명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오히려 영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운전 중 상향등을 켜서 상대방에게 먼저 가라고 신호를 보내는 행동이 더 문명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나는 결국 그것이 ‘억압’과 ‘배려’의 차이에서 온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억압은 야만적이고, 배려는 문명적이다. 이 명제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독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익숙한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책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의 틀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곧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상향등에 관해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약 70%가 산지로, 특히 강원도를 여행하다 보면 구불구불한 산길을 운전할 일이 많다. 그럴 때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상향등을 켠다면, 이는 앞에 사고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일 것이다. 교외 지역에서는 이미 상향등을 배려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도시에서도 조금씩 바꿔 나가면 어떨까? 화를 조금만 가라앉히고. 문명적으로.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c%84%b8%ea%b3%84%eb%a5%bc-%ec%9b%80%ec%a7%81%ec%9d%b8-%ec%97%b4-%ea%b0%80%ec%a7%80-%ed%94%84%eb%a0%88%ec%9e%84/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