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물이 빠져나가는 시간_엄마의 껌딱지

by 신수현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고, 눈은 소리 없이 내려 쌓였다.

내 기억 속의 나는 언제나 어리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짐작하기에는 너무 투명했고, 나의 세계를 지키기에는 너무 연약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의 중력을 거스를 수 없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 중력에 온몸을 맡긴 채 추락하는 것만이 내가 아는 유일한 비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교적이고 활발했던 엄마는 겨울이면 정전기가 일어나는 낡은 외투를 입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집으로 마실을 갔다. 방학이라는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던 나는 그림자처럼 엄마의 뒤를 따라갔다. 좁은 방 안에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의 무릎이 맞닿고, 화투패가 장판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착, 착'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나는 엄마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때 내가 기다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의 패가 좋아질 때마다 흘러나오던 미세한 콧노래였을까, 아니면 아주머니들의 거친 손끝에서 건네지던 눅눅한 개평 몇 푼이었을까. 어린 나는 아마도 그것이 사랑의 부스러기라고 믿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푼돈이 내 손바닥의 온기와 섞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세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방학은 늘 고독의 전시장 같았다. 언니들도, 동생도 분명 집안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었을 텐데, 내 기억 속 시간은 늘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오직 엄마의 손만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다. 엄마의 야무진 손끝은 언니들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나에게만은 그 축복이 비껴갔다. 엄마가 아버지와 동생의 조끼를 뜨기 위해 대바늘을 놀릴 때면, 나는 그 곁에서 은빛 바늘이 털실의 코를 꿰는 규칙적인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실과 실이 엮여 면이 되고, 그 면이 누군가의 체온을 감싸는 옷이 되는 과정은 내게 일종의 신성한 의식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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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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