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사실 난 엄청나게 무식한 놈이야. 평생 교과서를 제외한 책을 다섯 권도 안 읽었어." 당시에는 일종의 겸양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만큼 '무식'이라는 단어와 스타 교수의 이미지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전국에서 순위를 다투며 인생에서 실패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 같은 사람이 무식하다고?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 교수님이 진심을 이야기했던 게 아닌가 한다. 교수라는 직함을 쟁취하기 위해 책 한 권 읽을 짬 없을 정도로 빡빡한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나도 비슷하게 무식한 녀석이다. 입사 면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문학작품이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억지로 읽었던 《세 순경아저씨와 바다괴물》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을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책과는 친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은 일은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책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거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서의 효용은 책을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감성과 직감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독서의 힘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나 몇 권 읽은 내가 이를 어찌 알았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책이었을까? 무엇이 독학의 주 교재로 책을 선택하게 하였을까? 어차피 미국인보다 잘할 수 없는 영어 따위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우기던 고집불통이 어떻게 책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을까?
왕년의 재무팀 에이스로 돌아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 설명하자면 대략 이렇다. 우선 성공한 사람들 대다수가 책을 읽었다. 로켓에 대해 어디서 공부했냐는 질문에 일론 머스크는 책에서 배웠다고 했다. 뭐 천재니까 그렇다고 치자. 의대 출신이면서도 컴퓨터 백신을 개발하여 전 국민에게 무료로 나눠준 안철수 씨 - 정치인 안철수는 잠시 잊기로 하자 - 는 한 술 더 뜬다. 테니스도 - 처음에는 - 책으로 배웠단다. 테니스를 책으로 배운다고?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의 시작에는 항상 책이 있었다. 워런 버핏은 커리어 초기에 매일 600페이지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하며 빌 게이츠는 매일 잠들기 전 한 시간 이상의 독서를 한다고 한다. "독서가들이 모두 리더는 아니지만, 모든 리더들은 분명 독서가다"라고 한 해리 트루먼 - 미국 33대 대통령 - 의 말은 사실인 듯하다.
뿐만 아니다. 책에는 깊이가 있다. 어렵고 심오하다는 뜻이 아니다. 책의 깊이는 책이 지닌 완결함에서 나온다. 책은 한 권 한 권이 완성품이다. 우리는 그저 작가가 영혼까지 갈아 넣어 만든 지식의 액기스를 목으로 넘기기만 하면 된다. 아내가 첫 책을 낼 때가 기억난다. 아내는 마치 값비싼 양피지에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는 중세시대 수도사와 같았다. 심지어 글 쓰는 것이 직업이었는데도 말이다. 일을 할 때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라 - 임사이구(臨事而懼) - 던 공자의 기준으로는 세상의 모든 작가는 군자(君子) 일지도 모른다.
상황에도 적합했다. 당시 내 커리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과 같았다. 뚜렷한 계획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책은 나라는 작은 물고기가 자유롭게 뛰어놀기에 너무나도 넉넉한 바다였다. 온라인 서점에 생각나는 키워드를 아무거나 쳐보면 적어도 몇 권의 책은 검색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벌써 십여 년 전에 구글이 추정한 '세계에 있는 모든 책의 수'는 1억 권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출판시장이 부진한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6만 권이 넘는 신간이 발행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책은 원조다. 선물 받은 커피잔이 산지에 따라 가격이 몇 배 차이 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같은 브랜드라도 '메이드 인 잉글랜드'와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프리미엄이다. 시의성 높은 양질의 온라인 콘텐츠들이 더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원조는 원조다.
어쩌면 결정적인 계기는 아내였을지도 모르겠다. 퇴사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일했다 -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다 -. 직장에서의 아내는 달랐다. 착한 줄만 알았던 아내가 아니었다. 유능했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일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서히 아내의 진면목은 드러났다. 여러모로 뛰어난 점이 많았지만, 특히 사람의 마음 - 혹은 심리 - 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아내에게 비법을 물었다. 그리고 아내는 답했다. "오빠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져. 책을 안 읽어서 그런가.."
이것저것 그럴듯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창업 스토리와 같이 잘 짜인 이야기는 없다. 어쩌면 할 수 있는 게 독서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연'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그렇다. 마흔의 독서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통해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은 바뀌고 있다. 이 정도면 우연을 넘어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