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의 강박에서 벗어나다

by 날큐

대학시절 활동했던 재무 동아리에는 OB 세션이라는 게 있었다. 소위 잘 나가는(?) 선배들의 무용담을 듣는 자리였는데 하루는 투자은행(IB)에서 기업 인수합병(M&A) 업무를 하는 선배의 세션이 열렸다. 투자은행은 당시 동아리 친구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었다. 게다가 투자은행의 꽃이라고 불리는 기업 인수합병 부서에서 근무하는 선배라니!! 그래서인지 재학생들 뿐만 아니라 졸업한 선배들까지 자리하며 세션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시간가량의 세션이 끝난 후 선배는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두둑한 지원금을 남기며 떠나는 그 선배의 뒷모습은 영화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보다 멋지게 보였다. 그 선배가 남긴 말이 기억난다. "지난 5년 동안 딱 이틀 쉬었습니다. 그나마 일하다 쓰러져서 강제로 쉬게 되었습니다."



적게 쉬고 많이 일하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일주일에 백 시간씩 일하는 선배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나이에 비해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막대한 연봉의 대가인지 그들의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다. 눈밑은 검었다. 선배들은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었다. "시급으로 따지면 거의 편의점 알바 수준이야" 툭 던진 이 한 마디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그때마다 슈퍼 스타를 바라보는 극성팬의 눈빛으로 그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삶을 꿈꿨다. 하지만 공기업 비스름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대신 나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늦게까지 야근을 하거나 회식을 한 다음 날에도 새벽에 출근해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퇴근 후에는 학원에 다니기도 하였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얼토당토않은 욕구불만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거의 강박적으로 바쁜 삶에 집착하였다. 퇴사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코로나 위기로 사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며 거의 반백수 처지가 되었다. 그럴수록 빗나간 엘리트의 강박은 심해져만 갔다.



특히, 잠을 줄이는 것에 집착했다. 잠을 줄이는 희생을 마치 성공한 사람들만의 훈장처럼 여겼다. 4시간만 자고도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30대를 지나 40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목표와 멀어졌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먹는 것을 신경 써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이때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매슈 워커가 쓴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였다.



놀라운 돌파구!
과학자들이 수명을 늘리는 혁신적인 새로운 요법을 발견했다. 기억력도 강화하고 창의력도 더 높여 준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몸매를 더 날씬하게 유지하고 식욕도 줄여 준다. 암과 치매도 예방한다. 감기와 독감도 막아 준다. 심장 마비와 뇌졸증. 당뇨병 위험도 줄여 준다. 행복한 기분은 높이고 우울하고 불안한 기분은 줄여 준다. 관심이 가는지?



매슈 워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장인 양 들릴지 모르지만, 이 가상의 광고에 부정확한 내용은 없다. 이것이 신약 광고라면, 못 믿겠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설득된 사람들은 소량이라도 구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할 것이다. (중략) 물론 이 광고는 어떤 기적의 새로운 약물이나 만병통치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밤에 잠을 푹 잤을 때의 검증된 혜택들을 말한 것이다. 처방받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 한 푼도 안 든다. 공짜다. 그런데 종종 그렇듯이, 우리는 이 지극히 자연적인 치료제를 온전히 다 투여받으라는 밤의 초청을 거부하곤 한다. 그리하여 끔찍한 결과가 빚어진다."



저명한 신경학자의 저서답게 책은 전문적이고 어려웠다. 하지만 위의 가상광고가 매슈 워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의 전부였다. 실제로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하루 8시간 수면을 꼭 지킨다고 했다.



휴식에 대한 생각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 책은 《이토록 멋진 휴식》이었다. 책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32명이 어떻게 제대로 쉬는지, 양질의 휴식이 어떻게 그들의 창의성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했다 - 앞서 언급한 매슈 워커도 그중 한 명이었다 -. 쉬는 방법은 제각각이었지만 위대한 업적을 낸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무의식의 힘을 믿었다. 인간의 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연의 힘을 믿었다. 신이 그들의 겸손함을 칭찬이라도 하는 듯, 양질의 휴식은 어김없이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마침 창의적인 사고에 한창 관심을 갖던 터라 책의 내용은 더욱 와닿았다. 창의력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찾아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많은 이론들과 여러 명의 천재들에게서 확인한 참이었다. 다만 어리석게도 내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요즘 나는 9시 정도에 잠들어 새벽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적어도 7시간 이상 잔다는 말이다. 일주일에 몇 번은 뒷산으로 산책도 간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아내와 '달과산'이라는 작은 산악회를 만들어 매주 산보에 가까운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덕분에 우린 적게 싸운다. 분명 예전보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과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업은 코로나 위기를 딛고 다음 단계를 위해 달려가고 있으며 글쓰기를 시작한 지 년이 채 안 됐지만 벌써 브런치북을 두 개나 발행했고 나머지 몇 개도 최종 편집만을 남겨두고 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만으로도 휴식의 중요성은 충분히 느꼈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며 나의 책장은 채워질 테고, 나는 휴식을 통해 쌓아 온 지식들을 연결할 기회를 얻을 테니까 말이다. 잘못된 강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대로 놀아봐라.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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