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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Jun 30. 2023

댁은 뉘신지?

(똑똑)

"들어오세요"

(흠칫)

"안녕하세요. 저는 대표원장 OOO입니다"

"저는 같이 일하고 있는 OOO입니다"

"아 네.." 

(댁은 뉘신지?)


면접자를 흠칫 놀라게 한 건 바로 나다. 정체를 궁금하게 한 것도 나다. 그만큼 한의원에서 내 존재는 일반적이지 않다. 애매하다고도 볼 수 있다. 신분부터가 그렇다. 대표원장인 아내와 동업자라고 하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한의원에 소속된 직원이다. 한의사가 아니면 한의원의 공동대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호칭도 애매하다. 개원 초 나는 '운영원장'이라 불렸다. 직책에 맞게 의사가 입는 가운도 입었다. 무언가 께름칙했지만 뭐 마땅한 대안이 없어 거의 2년 동안을 '원장'이지만 진료는 못하는 '원장'으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변호사인 친구 녀석 하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너 그러다가 사칭죄로 잡혀 간다" 덜컥 겁이 났다. 그날로 가운을 벗었다. 그 덕에 아직도 전 회사 선배들은 나를 "원장님"이라고 부르며 놀려 댄다.      



          인구통계학적으로도 특이하다. 병원 급이 아닌 이상 한의원에서 남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한의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특히, 캐치프레이즈가 '요즘여자들의 한의원'인 우리 한의원에서는 한의사조차 모두 여자이다. 그것도 이삼십 대가 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한의원에서 일하는 사람  중 사십 대 남자는 내가 유일하다. 게다가 환자들도 3040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가끔 운영팀 직원이 자리를 비워 내가 환자를 응대 때면 그들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잘못 들어왔나?"






가장 어려웠던 건 한의사들과의 관계였다. 라이선스가 있는 자와 라이선스가 없는 자.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껄끄러운데 라이선스가 없는 내가 고용인이니 무척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하지만 ENTJ에게 그러한 조심성 따위는 없었다. 한 번은 부원장을 앞에 세워놓고 마치 부서장이 무능력한 직원을 나무라듯 뭐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분이 신입이었고 한의사 이전에 직장생활 경험이 있어서 이해해 준 것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원장님 죄송합니다. 그땐 저도 처음이라)



          그러다가 임자를 만났다. 아내보다 더 경력이 많은 한의사였다. 하루는 업무처리에 불만을 가진 내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원장님 차팅이 잘 안 되어 있어요. 앞으로는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상대의 답변은 의외였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의사도 아닌 네가 왜 나에게 이야기하느냐는 말투였다. 화가 났다. 한 번 고민할 새도 없이 나의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원장님이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부탁드린다고 표현했다고 부탁이 아닙니다. 제가 원장님께 지시한 겁니다"



          그날 이후로 그 부원장은 야근을 하고 있는 아내를 매일 찾아왔다. 그리고 몇 시간씩 불만을 토로하며 나의 사과를 요구하였다. 가뜩이나 별을 보며 퇴근하는 날이 많은데 이러다가는 아내가 다음날 해 뜨는 걸 보면서 퇴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부원장에게 사과를 하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요구하는 꽤 많은 위로금을 주고서야 새로운 부원장을 모실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다른 사람에게 '착각'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회식 자리의 '폭탄주 파도타기'마저 즐거워하던 '핵인싸'인 내가 정체성조차 애매한 '아싸'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고를 쳤다. 합정동과 망원동 사이 어딘가에 사무실을 얻었다. 그리고 '달과궁사무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다. 명함도 새로 팠다. 빳빳한 명함에는 '달과궁사무소 대표'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 있었다.



          명분은 그럴듯했다. 우선 한의원 직원이 늘어나며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해야 하는 실무도 실장에게 상당 부분 넘긴 터라 임대료 비싼 한의원 건물을 차지하며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 감은 있었지만 사업으로 확장하기 위한 고민도 필요할 거 같았다. 마침 아내도 진료 없는 날에 책을 쓰기 위해 카페를 전전하고 있었다. 며칠이라도 아내와 함께 일하면 시너지도 날 것 같았다.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명함을 갖고 싶었다. 직책이 또렷이 새겨 있는 명함만 있으면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무실을 오픈하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코로나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다. 한의원 주차장은 한산해졌고 나는 사무실을 정리하였다. 나의 짧은 '대표' 코스프레는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렸다.



          나는 요즘 실장과 함께 작은 방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 (실장은 초등학교 이후 누군가와 같은 책상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고 한다. 미안합니다. 실장님!) 그리고 동료들은 여전히 나를 '대표님'으로 부른다. 마땅히 대체할 만한 호칭도 없고 굳이 바꿔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젠 내 호칭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환자들에게는 그냥 직원이라고 할 정도이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진 않았다. 법적으로 나는 아직 한의원 소속 직원일 뿐이고 한의사도 아니다. 여전히 한의원 내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한 듯하다. 어느샌가부터 나는 지금의 애매한 위치를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내가 나를 인정한 것일까?







"요즘 뭐 하며 지내?"라고 주변에서 물을 때면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마치 위대한 사업을 위해 한의원에는 잠시 머무르는 것인 양 이야기했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요즘 나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한의원에서 일해요"


어쩌면 이게 나의 진짜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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