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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Jun 30. 2023

개원과 출산 사이

함께 일을 시작하던 그 해에 우리는 엄마와 아빠가 되었습니다. 

     개원을 준비하던 그 해 5월, 저는 임신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래, 우리가 그 해에 개원도 하고 임신도 했지' 정도로 간추려진 기억이지만 사실 아이를 기다린 시간이 먼저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임신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자 우리는 결단을 내렸지요. 아이란 게 언제 생길지 모르고 어쩌면 아주 안 생길 수도 있는 건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건 하늘에 맡기고 그냥 개원을 준비하자. 그리고 얼마 후에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한 해만 빨랐어도, 한 해만 느렸어도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삼신할머니는 참 짓궂은 분이시지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임신 초기에 하혈이 반복되어 개원일을 잡아두고도 두 번이나 날짜를 미뤄야 했던 것, 개원식 직전에 인근 상가에 떡을 돌리러 다니다 이제는 양수까지 새어 나와 개원식 날 오픈도 안 한 한의원 베드에 제일 먼저 누워있었던 것, 산부인과에 응급으로 입원을 했는데 출산하는 날까지 누워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가 잘못되어도 좋으냐'는 의사샘의 협박(?)을 뒤로하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것도 말입니다. 


     눈물 없이 듣기 힘든 '임산부 개원 일기' 레퍼토리는 늘어놓자면 끝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그때는 개원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컸던 건 남편이 이미 일을 그만두고 여기에 인볼브가 되었다는 거였습니다. 그 시절 남편이 늘 곁에 있어 너무 힘이 되었지만 함께 여기에 인생을 걸었던 것이 커다란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달랐다면 저는 아마 개원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이 도와 결국 저는 아이를 지켰고 우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둘 다 무럭무럭 자라 지금도 저희와 함께 있습니다. 삼신할머니와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과 유산방지한약에 이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일과 육아, 육아와 일의 세계로 함께 뛰어들었습니다. 




    출산 후 진료를 대진해 주실 원장님께 인수인계를 한 건 미리 수술날짜를 잡아둔 예정일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중기 이후로 유산의 위험은 잦아들었지만 주위에서 쌍둥이 아닌 거 맞냐고 수시로 물어봤을 정도로 초기부터 배가 너무 거대해서 임신 후기에는 눈사람처럼 굴러다녔어요. 그렇게 출산하고 나서 병원에 3박 4일, 조리원에서 3주, 퇴원해서 집에 와서 3주. 그게 제 출산 휴가의 전부였습니다.


    지금 말하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짧은데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은 함께 일한 이후로 그 시간이 본인에게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하더군요. 이해도 됩니다. 개원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업장, 같이 일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여자 원장님과 선생님들 사이에 한의사도 아닌 남자 공동대표의 존재. 외로웠을 것도 같습니다. 대기업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일하던 속에서 빛났던 사람, 게다가 대표는 원래 외롭다는 것도 아직은 체득하지 못했을 만큼 초기였으니 더 힘들었겠지요.  


    그러나, '그래 너도 참 힘들었겠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진료에 복귀하기로 한 결정은 스스로 했으면서도 출근하려고 샤워하다 젖을 짜내어 버리면서도 울고, 아이를 두고 나서면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울고, 멀쩡히 잘 진료하다도 갑자기 터져서 울던 날들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그게 산후우울증이었던 것도 같고, 진짜 우울증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모두 너무 쉽게 바닥났던 날들로부터 벗어난 건 그럭저럭 1년도 더 지나서였지요. 


     우리가 함께 일하기 시작하자마자 저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산후의 기간을 함께 겪은 것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일을 겪지 않고 동업이 시작되었더라면 아마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요.




     이제 막 시작된 '사업 파트너'로서 우리는 초기에 서로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수습하는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함께 일해본 건 처음이었으니 초반에 탐색하며 서로의 스타일과 능력치를 가늠해 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관계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하는 그 시절에 우리는 그 역할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각자 최선을 다해도 될까말까한 프로젝트 두 개로 투잡을 뛴 셈이니까요.

  

     일을 시작한 직후 텐션이 가장 높았어야 할 그 시기에 저는 저질 체력에 감정기복이 쩔었습니다. 남편에게 의지하면서도 짜증이 나고, 고마우면서도 원망이 터지고, 무엇보다 아이 얼굴도 못 보고 나와 일하는데 일도 잘 못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제 일은 남편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지요.


     생각해 보면 남편 입장에서는 야심 차게 시작한 스타트업의 공동대표가 처음 몇 달은 틈만 나면 졸고 있고, 한 달 반쯤 휴가 내서 쉬더니 돌아와서도 매일 피곤하고 우울한 얼굴로 짜증만 낸 셈입니다. 처음 겪어본 일이니 대체 얼마나 피곤한 건지 언제쯤 회복되는지 알 길이 없어 더 힘들었겠지요. 출산이 늦었고 조리 기간도 부족했던 저의 회복은 남편이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했는데도 '그 정도'가 안 됐던 겁니다. 누구도 잘못은 안 했는데 서로 많이 지쳤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후로 아마 남편의 기억 속에 저는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꽤 오랫동안 예민하게 굴었던 기억이 없는데도 여전히 남편은 제가 표현 하나 말 한마디에 무척 예민한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때는 분명 너무 힘들어서 속으로 '이게 다 넛때문이다!!'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최근 수년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제가 계속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뭐 어쩔 수 있나요. 동업자로서의 제 첫인상이 그랬던 겁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함께 일하고 있으니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관계에서 첫인상은 중요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니까요. 저도 사업 초기부터 습관처럼 남편에게 일정 부분을 의존하듯 의지해온 버릇을 고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로 더 나은 파트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어제보다 내일 조금 더 나아지겠지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거, 그게 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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