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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Oct 20. 2023

세상을 바꾼 반골기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2)

아인슈타인, 그는 누구인가?

근무 중에 한 딴짓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것도 두 개나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땡땡이는 수백 년간 물리학계를 지배하던 뉴턴의 고전역학에 도전장을 던지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고 사고의 영역을 3차원에서 4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그의 업적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 (우리는) 거시적 수준에서는 그의 상대성 이론으로 정의되고, 미시적 수준에서는 양자역학으로 정의되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일들이 늘 그렇듯, 아인슈타인의 발견도 운과 실력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광양자와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던 시절 그는 특허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천재의 대명사인 그에게는 다소 엉뚱한 직장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특허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은 그와 잘 맞았다. 덕분에 그는 하루의 일을 한 시간에서 세 시간이면 마칠 수 있었다. 게다가 상사가 너그러웠다. 책상 위에 종이를 잔뜩 늘어놓았다가 사람들이 다가가면 황급히 서랍 속으로 감춰버리는 것을 눈 감아주었으니 말이다.



          노벨상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상금 전부가 당사자가 아닌 그의 전처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첫 번째 노벨상을 받기 수년 전 - 이혼은 1919년, 노벨상은 1921년(실제 수상은 1922년)이었다 -, 당시 아내였던 마리치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자신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텐데, 만약 자신과 이혼해 준다면 그녀에게 상금을 모두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뢰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믿었던 듯하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는 과정에 있었다. 그의 논문은 내용이 파격적인 데다가 철저한 고증을 선호하는 노벨상 위원회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때문에 논문이 발표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인슈타인은 상을 받게 된다. 신기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정작 초조해하는 쪽은 노벨상 위원회였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이 수상을 하지 못하면서 노벨상 자체의 위상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게 진정한 권위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은 아주 늦게 말을 배웠다. 하녀는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뜻으로 '데페르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대학 입시에 한 번 실패했고 졸업생 5명 중에 4등으로 졸업했다 - 시험 성적은 좋았지만 졸업논문에서 저조한 점수를 받았다 -. 심지어 수학 교수에게 '게으른 개'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그는 졸업 후 5년이 지나서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에 임용되기까지는 무려 9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 그를 제외한 동기들은 졸업 후 곧바로 교수가 되었다 -. 그래서 그는 특허사무소에 취직해야 했다. 그마저도 친구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한 마디로 낙하산이었다. 기적의 해 -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바꾼 논문 5편을 발표한 해 -라 불리는 1905년의 논문들도 사실은 거창한 목표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박사학위를 따서 특허사무소 3급 심사관에서 2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이런 면은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대체 무엇이 평범해 보이는 천재의 삶 속에서 위대함을 만들어냈을까? 그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에게는 연필 한 자루 없이도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를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사고실험'이라고 한다. 상상 속에서 그는 빛의 속도로 움직였고 4차원의 세계를 거닐었다. 원자들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진 상자를 관찰했다. 굽은 우주를 그려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상대성이론이 탄생하였고 광양자설도 세상에 나왔다. 그에게 실험실은 필요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하면 그만이었다. 이 정도면 딴짓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찾아올 여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산책을 즐겼고 호수에 보트를 띄워놓고 사색을 하기도 하였다.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했는데, 그는 생각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어려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음악에서 위안을 얻고 길을 찾았다. 또한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철학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특히 데이비드 흄의 경험주의는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내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사고실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양질의 휴식과 음악, 철학 등으로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힐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 4차원의 공간을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시간씩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런 멋진 두뇌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인슈타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사고실험 못지않은 무기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인슈타인을 만든 진짜 무기는 천부적인 두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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