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두통의 이유

프롤로그

by 날큐

여덟 살 무렵이었던 거 같다. 자꾸 머리가 아팠다. 처음에는 며칠 지나면 괜찮겠거니 했다. 하지만 두통은 나의 유년기 내내 함께 하였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터라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몸이 약해서 그렇다는 말에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꽤 오랫동안 보약을 지어 먹이셨다. 덕분에 몸은 건강해졌지만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정신과 상담도 받았다(당시 정신과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는 달리 매우 부정적이었다). 소용없었다. 심지어 평소 성당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시던 할머니는 악마가 들려서 그런 거라고까지 하셨다. 누가 머리에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나였지만 결국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 목사의 두터운 손바닥 압력을 견뎌내야 했다(얼마 후 기도원 건립 자금 횡령으로 사법처리된 걸로 봐서 정상적인 성직자는 아니었던 듯싶다). 안수 기도도 소용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야 악마가 씌었다는 오해는 풀렸다.

의사의 차트에는 아마 '상세불명의 두통'이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두통의 이유를. 당시 나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낡은 천문학이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부모님의 권유(라기보다는 지시 또는 명령에 가깝다)로 성당에 다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작은 세계관에 균열이 생겼다. 기독교의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신이 중심이고 나는 창조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민이 이어졌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은 뭐지?', '그렇다면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내 삶은 정해져 있다는 건가?', '나는 왜 존재하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유년기 소년의 깜냥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난 길 잃은 한 마리 어린양이 되었다. 나를 인도해 줄 목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기도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나를 인도해 줄 목자가 나를 혼돈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깊이만큼이나 반항심도 커졌다. 나를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낸 성당이 싫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먼지가 되어 거대한 우주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신론자와 허무주의자를 오간 끝에 나는 결심했다. 내가 중심이 될 수 없는 세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신 따위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반항했다. 말 잘 듣는 모범생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생애 첫 투쟁은 성공적이었다. 그 후로 나는 성당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미사 시간과 겹쳐서 보지 못했던 프로레슬링을 볼 수 있었다(당시 거의 모든 남자 초등학생들은 토요일 오후에 AFKN에서 하는 프로레슬링을 시청하였다).

프로레슬링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을까? 어느샌가부터 나의 두통은 자취를 감췄다. 어릴 적 잠시 머물다 간 천재성(누구나 어릴 땐 천재다)을 잃어버린 건지, 시급한 현실의 문제들이 쓸모없어 보이는 철학적 의문들을 밀어내 버린 건지, 너무 생각을 하다 360도 돌아 버려서 제 자리로 돌아온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땐 몰랐다. 내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도,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가 있는 것조차도. 나르시시스트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아내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진단받다


아내와는 연애 10년, 결혼 13년, 도합 23년을 알고 지낸 사이다. 얼마 전 생일이 지나며 마흔여섯이 되었으니 인생의 반을 그녀와 함께 한 셈이다. 아내와 나는 대학에서 만났다. 나이는 내가 두 살 위였지만 학교에 늦게 들어간 탓에 첫 호칭은 선배였다. 선배는 나를 신기해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토록 멋진 사람과 만날 수 있었는지를 놀라워했고, 콩깍지가 제대로 씐 연애초기를 지나서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사 자신만만한지를, 나아가 이런 단단한 자존감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따위를 궁금해했다. 당시 아내가 한 말이 있다. "오빠는 아프리카 한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추장 하면서 잘 살 사람이야!"

결혼 후 나에 대한 호기심은 약간 변질되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자기밖에 모를 수 있지?', '내가 어쩌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지?'

뉘앙스가 좀 바뀌기는 했지만 나는 만족한다.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 사이 궁금한 것만 바뀐 것은 아니다. 아내는 패션에디터 생활을 거쳐 다시 한번 대학에 입학했고 지금은 한의사로 일하고 있다. 의료인이 되고 나서는 나에 대한 호기심도 학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아내의 결론은 '나르시시스트'다. 아내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을 할 때 나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입고리만 씰룩거렸다고 한다. 그녀는 이를 암묵적인 동의로 간주하고 있다. 평소 나는 우겼던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거나,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할 때 특유의 표정과 함께 오른쪽 입고리를 미세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가 끝난 후 곧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으로 구글링을 해보았다. 그리고 피하기 어려운 진실과 대면할 수 있었다. 몇몇 문항을 제외하고는 흡사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나서 쓴 듯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과장된 자기 중요성, 과대망상(좋게 말해 큰 포부), 공감 능력 부족, 끊임없는 인정에 대한 욕구 등 부정하기 어려운 특징들이 나열돼 있었다. 그나마 아니라고 우겨볼 수 있는 건 성공을 위한 착취적인 행동과 시기심 정도였다. 그마저도 그리 자신 있지는 않았다.

나르시시스트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 평소 내 상식 수준을 감안했을 때 당연히 몰랐어야 할 의학 용어였지만 마침 일론 머스크를 다룬 평전을 읽은 터라 단박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땐 조목조목 반박하며 간신히 아스퍼거 증후군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으나 싱크로율이 좀 떨어질 뿐 내가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전문적으로 더 깊게 들어가면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아스퍼거 증후군은 나르시시즘의 강화 버전쯤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나르시시즘과 아스퍼거 증후군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이며 망상에 가까운 포부를 가진 아저씨다.


나르시시즘과 자폐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정체를 인정하게 된 것은 나를 닮은 딸 '제이'가 자폐 성향을 가진 것이 거의 확실해질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서울대 출신이었고 지능지수도 꽤 높은 편이었다. 일도 곧잘 해서 동업을 하기 전 각자의 직장에서 에이스로 불렸다. 평소 좋아하던 확률을 기초로 볼 때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자폐는 원인을 알 수 없기에 사실 확률과 관련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났고 나는 수년간 병원과 특수교육기관을 오간 뒤에야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그 불안한 기간은 나에 대해서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은 제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딸을 보며 그동안 조그마한 강아지가 왜 그렇게 나를 보며 짖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무서워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개와 눈싸움을 하지 않는다), 줄넘기도 사교육으로 시키고 있는 나의 상황에(특수교육기관에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주로 배운다) 그동안 맹렬히 비판했던 엄마들을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제이를 보며, 딸에게 같은 지시를 거듭하고 있는 나를 보며 '내가 싫어하는 행동들'의 리스트를 줄일 수 있었고, 제이와 관련된 사람들(대부분 선생님들이다)을 만나면 연신 굽신거리는 낯선 나의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아내는 내가 굽신거린다고 느끼는 수준이 보통 사람들의 친절함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이젠 부장님이 임원을 위해 잡아놓은 택시에 먼저 올라타던 내가 아니다. 이런 걸 거울치료라고 해야 하나?

제이와 나의 차이에서 배운 것도 있다. 특히 지금만 사는 듯한 아이의 모습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제이의 삶은 온통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가령 지금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일요일에 놀이공원에 갈까?"라는 질문을 하면 제이는 싫다고 한다.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제이는 놀이공원에 가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유튜브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제에 대해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제이가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튜브를 끄자마자 바로 놀이공원에 가자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제이는 행복하다. 역시 행복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듯하다. 반면 나는 지금을 사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내 머릿속은 항상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하다. 현재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을 정도다. 어쩌면 나는 행복의 반대편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올라타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엘리트 코스프레를 하던 나는 이 평범한 진리를 발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 딸에게서 배우고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고기능자폐로 분류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아스퍼거 증후군은 좀 똑똑한 자폐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와 함께 한 이후로 내 정체를 인정한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헷갈리는 질환이 나르시시즘과 맥락을 같이 한다면 결국 내 딸과 나는 같은 범주 안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내가 아스퍼거 증후군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범주'라는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범주에는 반드시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는 선 안에, 누군가는 선 밖에 있어야 한다. 분류학에 대한 집착이 우생학으로 변질되었듯, 인간을 나누고 합치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우열의 개념으로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라는 범주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것'은 기본적으로는 다수를 말하는 것이며, 사회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귀찮은 것, 방해되는 것이 '비정상'이라고 정리되는 것이다(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 입문》에서 인용). 다시 말해 장애인은 귀찮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돌봄'이라는 미명 아래 주류의 틀 안에 넣는다는 것이다. 평소 아내에게 사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핀잔을 듣는 나보다도 훨씬 부정적인 시각이다. 푸코의 아내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스펙트럼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정신질환처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는 특히 그렇다. 덕분에 제이는 자폐아가 아니다. 자폐 스펙트럼에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일 뿐이다. 물론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보다 많은 아이들을 발달장애의 범주에 넣어 상업적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거나 잘못된 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의학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칼로 무 자르듯 사람들을 나눴던 과거에 비해서는 무척 겸손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변화는 인정에서 시작된다. 제이와 함께 한 이후 나는 내 딸이 발달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또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랬더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요즘 나의 하루에는 두 개의 태양이 뜨고 진다. 쌍성계(두 개의 항성이 서로의 중력에 묶여 공전하는 시스템)가 그렇듯 제이라는 또 다른 태양을 받아들인 나의 우주도 꽤나 안정적이다. 제이는 매일매일을 즐거워하며 초등학교에서 한 해를 훌륭하게 마쳤고 나도 가끔은 웃고 있으니 말이다. 뭐 이거면 된 건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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