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구원의 또 다른 형태

by 신성규

나는 종종 지성에 민감한 나를 의심한다.

사고력, 속도, 정확성—그 모든 것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교회의 신도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기준들이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거기엔 지성으로 측정할 수 없는 따뜻함이 있고,

그 따뜻함이 나를 치유한다.


교회의 사람들은 특별히 더 똑똑하지 않다.

그들은 ‘정보를 잘 다루는 존재’가 아니라,

‘상처를 잘 감싸는 존재’다.

그들의 말은 논리보다 앞서 마음에 와닿고,

그들의 행동은 전략보다 먼저 나를 흔든다.


나는 힌두교에서 깊은 내적 통찰과 의식의 확장을 배웠다.

고요하고 정제된 고독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는 법도.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품어낸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덜 고요하고, 덜 정제되어 있음에도

더 크고 실제적인 ‘구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나는 종종 마음이 흔들린다.


힌두교는 ‘자기 극복’을 통해 해탈로 나아가려 한다.

하지만 교회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머무름’으로

서로를 천천히 끌어올린다.

전자는 개인의 자유를 지향하고,

후자는 공동체의 회복을 이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생각하게 된다.

‘지성’이 구원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깨달음’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을까?


사랑은 종종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사랑만이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구원한다.

길을 잃은 이에게 다가가는 손,

이유 없이 용서하는 마음,

대가를 묻지 않는 친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말한다.

사랑은 구원의 또 다른 형태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깊은 형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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