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듣기 싫은 말을 듣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듣기 싫은 말 앞에서 귀를 닫고, 마음을 방어하며, 때로는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 말이 사실일수록, 내면 깊은 곳의 불안을 건드릴수록, 그 반응은 격렬해진다. 우리는 진실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진실이 주는 불편함을 회피하려 한다. 이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여 듣곤 한다. 이러한 사고 구조는 무의식 속에 패턴화가 되어 있다.
이것은 인지부조화의 고전적 메커니즘이다. 자신이 믿는 세계, 자아의 이미지를 위협하는 말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특히 그 말이 진실이고, 내면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일수록, 분노는 격해진다. 이는 단지 개인의 심리가 아니다. 집단, 공동체, 나아가 국가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아가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단지 개인의 심리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나타난다. 어떤 공동체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당할 때 격렬히 반응한다. 어떤 국가는 과거의 과오를 되짚는 역사학자를 “매국노”라 부른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그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자각이 있다. 그리고 그 자각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이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진실을 묻어버리려 한다.
독일의 나치 청산 과정을 보자. 전후 독일은 오랫동안 “그건 나치였지, 독일인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집단적 책임을 회피했다. 홀로코스트는 그저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들의 일이었고, 평범한 독일인은 피해자라는 프레임 속에서, 진실을 직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 오랜 과정을 거쳐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한 후 독일 사회는 성숙을 이뤄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권 운동이 거세질 때마다, 등장하는 반응도 이와 닮아 있다. “All lives matter”라고 외치는 이들은, “Black lives matter”가 말하고자 한 진짜 메시지, 즉 구조적 인종차별을 인정하는 순간 느낄 자신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회피하려 한다. 이는 진실을 희석시키는 방식의 방어다.
이 모든 사례는 같은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왜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가?“ 그 말이 사실일수록, 그리고 그 사실이 내가 누려온 일상의 특권이나 안위를 흔들수록, 우리는 그 말을 왜곡하고 공격하고, 축소한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정체성의 문제다.
진실은 성장을 요구한다. 그것은 익숙했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자아를 재편성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진실을 듣는 일은 고통스럽고, 위험하며, 때로는 사회적 혼란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사회는 진짜로 변하지 않는다. 진실을 듣지 않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속이다 무너진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용기다.
그러나 진실을 듣는 것은 훨씬 더 큰 용기다.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보고 싶은 진실만을 받아들이는가? 진실은 항상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성장은 불편함을 통과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진실 앞에서 분노하지 않고, 멈추고 숙고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비로소 진실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