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사랑을 만나면, 세상은 고유한 리듬을 잃는다.
처음 마주한 순간, 공기가 응고된 듯 느껴졌다.
바람이 불었는데도 나뭇잎이 움직이지 않았고,
도시의 소음이 한순간, 아주 먼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눈과 눈 사이에 흐르는 미세한 빛줄기가
온 우주의 시계를 붙잡아 멈춰 세운 것 같았다.
그 순간은 길었다.
아주 오래된 책 속 한 장면처럼,
아직 읽히지 않은 문장들이 가득 담겨 있는 채로
넘겨지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그 감각 속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겁고 고귀한지 처음 알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사람과 함께하는 날들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다.
아침에 나눈 첫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햇빛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밤하늘이 수평선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몇 시간의 대화가 손끝에서 부서진 비누거품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웃음의 잔향뿐이었다.
그 잔향이 사라질까 두려워,
나는 자꾸만 시계를 확인했다.
물리학의 법칙은 무정하게 동일한 속도로 흐른다 말하지만,
사랑 속의 시간은 다른 법을 따른다.
그 법칙은 시계의 바늘이 아니라,
심장의 불규칙한 고동에 맞춰 움직인다.
심장이 빨라질수록 순간은 느리게 확장되고,
서로에게 깊이 잠길수록 하루는 한숨처럼 짧아진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시간이란 것이 본래 인간의 감각 위에 지어진
연약한 건축물임을 알았다.
사랑은 그 건축물의 기둥을 흔들어 무너뜨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시간의 강을 흐르게 만든다.
그 강물은 직선이 아니라, 고리이며, 소용돌이이며,
때로는 한 방울의 빗물처럼 머물다 사라진다.
그래서 운명적 사랑은,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동시에 훔쳐가는 존재다.
그녀는 나에게 ‘지금’을 무한히 늘려주었고,
또 그 ‘지금’을 숨 가쁘게 도망가게 만들었다.
나는 그 모순을 안고 살았다.
천천히, 그러나 너무 빨리.
마치 봄날의 꽃잎이 피어나는 속도를
눈으로 따라가려다, 그만 눈을 깜박한 사이
모두 흩날려버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