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나 자신을 낯설게 느낀다.
너무 낯설어서, 마치 내가 두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는 통제하고 싶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이다.
하나는 히틀러처럼 내 안의 혼란을 질서로 바꾸고 싶어 한다.
내 방식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관계 안에서
선명한 기준, 확고한 신념, 절대적인 방향을 요구한다.
이 충동은 종종 정당해 보인다.
“그게 옳은 일이야.”
“그건 망가뜨려야 해.”
“세상은 이런 식으로 흘러야 해.”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그런 목소리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정의감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다른 날은 간디가 된다.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말 한마디에 마음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 애쓴다.
누군가 나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그도 힘들었겠지” 하고 생각하고,
내가 상처받는 순간에도
“나는 더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세상은 결국 사랑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참 묘하지.
히틀러와 간디.
그 둘은 너무도 다르다.
하나는 인간을 말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낸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사람 모두의 조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날에는 세상의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어진다.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들을 부정할 근거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곧 정의라고 믿는다.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품어야 한다는 이상을 품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악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그 악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견디는 일.
히틀러는 완전히 타자가 아니다.
그는 어떤 극단적인 인간의 상징이면서,
내 안의 권위주의적 욕망, 통제의 욕망,
질서에 대한 강박,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강한 자아의 초상이다.
간디는 마찬가지로 내 안의 이상향이다.
누구도 다치지 않게,
누구도 배제하지 않게,
내 존재가 이 세상에 상처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나는 히틀러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간디를 호출한다.
그리고 간디가 되기 위해
히틀러를 이해하려 애쓴다.
인간은 단 하나의 얼굴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나를 만나고,
어제의 나와 충돌하며,
그 충돌 속에서 나를 세우고 다시 해체하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안다.
두려움은 히틀러를 만들고, 용기는 간디를 만든다.
그리고 이 둘 모두의 씨앗은 내 안에 있다.
다만 어떤 나를 키울지,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지는
내 선택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순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를 ‘인간’이라 부르게 하는 유일한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