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웃 중 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는 소설을 못 쓴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야말로 소설을 잘 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자기 마음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집요하게 붙잡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한다. 그러나 그 자기 집착은 단순한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자기 관찰이 되고, 자기 심리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 보편의 욕망, 두려움, 허무를 포착한다. 그래서 그들이 쓴 문장은 결국 자기 고백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심리학적 기록이 된다.
나는 그런 작가들을 떠올린다. 프루스트, 에즈라 파운드, 오스카 와일드. 그들은 모두 자기 세계에 몰두한 나르시시스트였다. 그러나 그 자기애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걸작을, 화려하게 빛나는 시와 산문을 얻게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삶을 예술처럼 살았기에 그의 작품은 여전히 반짝이고, 프루스트가 자기 기억을 신성시했기에 우리의 시간 감각은 새롭게 쓰였다.
프루스트는 더 나아가 생물의 본질은 자웅동체라고까지 말했다. 진화론적으로는 불리할 수 있지만, 그의 말은 생물학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향한 은유였다. 자웅동체란 결국 자기 안에서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 곧 자족적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루스트의 나르시시즘이 드러난다. 그는 사랑마저 자기 내부에서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사랑을 자기 속에서만 완성하는 순간, 타인과의 연결은 무너진다. 사랑은 원래 타자와의 긴장, 결핍, 교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데, 나르시시스트는 그 운동을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찬란한 동시에 고립적이다. 그는 세계를 자기 내부에서 재현하며, 자기 속에서 사랑을 완성하려 했지만, 그 대가로 타인과 단절되었다. 그것이 프루스트의 문학을 위대한 동시에 비극적으로 만든다.
어떤 비평가들은 말한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일정 부분 나르시시스트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예술가란 결국 자기 목소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다. “나의 시선이 진실이다”라는 자기 확신 없이는 어떤 작품도 탄생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은 예술가의 병이자 동시에 원동력이다.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욕망은 작품을 낳지만, 동시에 삶에서는 단절을 낳는다. 사랑은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만 완성된 사랑은 예술이 될 수는 있어도, 삶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예술가 대부분은 나르시시스트다. 자기애가 없었다면, 그 고독과 의심을 견디며 글을 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통해 인간 전체를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기애적 집착 속에서 문학은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