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손을 거쳐야만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던 시대가 있었다. 정밀한 손놀림, 오랜 수련의 시간, 백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존재. ‘의사’라는 이름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서 신뢰와 권위를 상징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 권위를 하나씩 벗기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의사라는 직업군의 마지막 세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사의 일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문진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진단을 통해 병의 본질을 추정하며, 처방으로 치료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과정은 마치 거대한 정보처리 시스템과 닮아 있다. 데이터가 입력되고, 프로토콜에 따라 분석되며, 결과가 출력된다. 지식에 기반한 반복적 의사결정. 이 구조는 이미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방식이다.
물론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환자의 말투에서 미묘한 이상을 감지하고,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통증의 성격을 이해하며, 때로는 진단을 넘어서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그런 ‘사람다움’은 의사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성의 일부일 뿐이다. 정보 전달자, 분석가, 권위자로서의 의사 — 이 역할들은 점점 더 기계와 데이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특히 수술과 같은 물리적 개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진료 행위는 이미 구조적으로 대체 가능하다. 증상 입력, 알고리즘 기반 진단, 통계 기반 약물 추천. 이는 단순히 ‘가능하다’가 아니라, 실제로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인간은 피곤하고 감정적이며, 실수하고, 편견에 빠진다. AI는 지치지 않고, 일관되며, 학습한다.
한때 의사만이 읽을 수 있었던 의학 교과서, 라틴어로 쓰인 처방전, 복잡한 판독이 필요한 영상 자료. 이 모든 정보들은 더 이상 의사만의 영역이 아니다. 인터넷, 플랫폼 기반 진단 서비스, 환자용 챗봇은 지식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환자들은 이제 ‘모르는 자’가 아니라, ‘결정권을 가진 소비자’로 변하고 있다.
즉, 의사는 정보를 독점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보 사이의 ‘맥락’을 연결해주는 중개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할조차 AI는 점점 더 잘해내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와 환자의 맥락을 종합해 판단을 제시한다. ‘지식’만으로 유지되던 전문직의 신화는 급속히 무너진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곧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수많은 시험, 실습, 인증과정은 단지 교육의 절차가 아니라 권위의 장치였다. 그러나 이 자격증 중심의 세계관도 끝나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자격이 아니라 기능과 결과를 요구한다. 더 잘 진단하고, 더 정확하게 예측하며, 더 빠르게 처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든 기계든 상관없다. 사회는 이미 ‘누가 했는가’보다 ‘무엇을 해냈는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행 중이다.
아마 외과, 신경외과 등 고난이도 수술 정도가 남을 것이다. 정밀한 손기술과 순간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그러나 로봇 수술 보조로 대체율 증가 중)
그렇다면 무엇이 남을까?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성? 그러나 그것은 직업이 아닌 태도의 문제다. 직업은 사라지고, 태도만 남는다. 결국 미래에 의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데이터를 넘어서 고통을 듣고,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의료 시스템의 중심축은 ‘지식+판단’에서 ‘데이터+시스템’으로 직업군 자체는 유지되지만, 구조와 위계가 바뀌고 이름이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직업의 종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는 곧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다. 지식은 저장되고, 전송되며, 대체된다. 그러나 존재는 여전히 이해받기를 원한다. 고통은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 순간에 피어나며, 공감은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결을 지닌다.
이 변화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문직’이라는 신화를 어떻게 해체해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엔 정보의 비대칭이 권력이었지만, 이제는 정보 그 자체가 대중화되며 권위는 흔들린다. 우리는 지금, 권위를 해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제, 교수, 의사 — 이 이름들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의사는 사라지겠지만, ‘고통을 돌보는 존재’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