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을 남성과 여성, 혹은 본능과 이성처럼 선명한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시도는 오래된 철학의 유산이다. 그러나 이 분류 방식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혼란을 낳는다. 인간은 선천적 형질보다 후천적 환경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성격과 관점이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믿고, 그것이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격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은 유년기의 환경, 경험에 의해 형성된 습관적 반응이거나, 트라우마를 회피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 장치다. 즉 ‘타고난 나’라 생각하는 부분 상당수는 사실상 삶의 우연과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만약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자란다면,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감정 구조, 사회적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문화, 언어, 규범, 기대치, 갈등 해결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정된 본질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적 존재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되는 존재는 우리가 속한 공간과 관계의 함수이며, 사고와 감정은 어느 공간에 자신을 노출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자기계발적 슬로건이 아니다. 신경가소성, 애착이론, 사회구성주의 모두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변하고, 그 변화는 환경과 경험, 그리고 스스로 택한 방향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진정한 자기 형성은 내면만을 파고드는 고독한 수련이 아니라, 자신이 되고자 하는 세계 속으로 이동하고 그 세계와 접속하려는 의지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 다시 빚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
결국 인간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총합이다. 변화할 능력, 그리고 변화를 가능하게 할 환경을 선택할 힘. 그 두 가지가 인간을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