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골목을 걷다 보면,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은 여성을 자주 본다.
그녀의 눈빛은 단순한 주인의 시선이 아니다. 마치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처럼, 부드럽고 경계심이 없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결혼 안 할 거예요. 혼자가 더 편해요.”
그 말 뒤에는 종종 묘한 온기가 남는다.
자유의 언어이면서도, 어딘가 결핍을 덮는 주문처럼 들린다.
그녀들이 키우는 고양이와 강아지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다.
그 존재는 현대의 모성 본능이 전이된 상징이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본능은 오랜 세월 생존의 근원이었고, 여성에게는 더욱 생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그 본능이 더 이상 인간의 아이로 향하지 않는다.
결혼은 부담이 되었고, 출산은 선택이 되었으며, 관계는 종종 상처로 남는다.
그래서 그녀들은 더 순수한 형태의 의존을 찾아 나선다 — 말하지 않는 생명, 상처 주지 않는 존재에게로.
고양이는 그녀를 필요로 한다.
강아지는 그녀가 돌아오면 미친 듯이 반긴다.
그 짧고 즉각적인 사랑 속에서, 그녀는 인간관계에서 잃어버린 감정의 명료함을 되찾는다.
고양이의 그루밍 소리, 강아지의 숨소리, 새벽에 옆에서 고요히 잠드는 모습은,
현대 사회가 빼앗아간 관계의 순수한 형태를 복원한다.
비혼을 택한 여성들이 모두 외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지키고, 타인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유의 대가로, 한 가지 본능만큼은 어딘가 미묘하게 남는다 —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피고 싶은 마음.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대상을 바꿔 살아남은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모성의 대체적 구현이다.
아이 대신 고양이, 남편 대신 강아지, 가족 대신 공동체.
돌봄의 구조는 그대로이되, 그 대상만 교체된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이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 변형된 결과다.
“보살핌”이라는 본능적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형태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녀들이 반려동물을 입양할 때 느끼는 설렘은, 과거 여성들이 출산을 준비하며 느꼈던 두려움과 기대의 혼합된 감정과 닮았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들이 반려동물을 꼭 껴안은 채 눈을 감는 모습,
SNS에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며 “우리 아가”라 부르는 말 속에서,
나는 현대적 고독의 형태를 본다.
그 고독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향할 곳을 잃은 고독이다.
사랑할 줄 아는 존재가 사랑을 표현할 통로를 잃었을 때 생기는,
묵직한 정서적 잉여.
이제 고양이와 강아지는 단순히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잃어버린 가족의 대체물이 되었다.
그녀들은 아이처럼 이름을 지어주고, 생일을 챙기며, 아플 때는 병원에 데려간다.
어떤 이는 보험을 들고, 어떤 이는 유산을 반려동물 이름으로 남긴다.
이 모든 행위는 사실상 모성의 의례화다.
그녀들은 돌봄의 본능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 속에는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조용한 자존감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아이가 아니라 동물에게로 향한다.
그 사랑은 대화할 수 없고, 대물림되지 않는다.
그녀들은 본능을 실현하면서도, 어쩌면 가계의 시간성, 인간 관계의 연속성을 잃는다.
그것이 내가 느끼는 ‘딱함’의 본질이다.
그녀들은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진심이지만, 방향이 바뀐 진심이다.
그러나 그 진심을 누가 감히 가벼이 평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생존 방식의 진화일지도 모른다.
핵가족이 붕괴되고, 사회적 신뢰가 약화된 시대에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비언어적 존재’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상처가 없고, 배신이 없으며, 조건 없는 순수만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그 안에서 자유와 모성, 독립과 의존을 동시에 실현한다.
결국 고양이를 품은 여성의 모습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다만 그 대상이 당신이 아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