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지능을 하나의 축으로 세우고 사람들을 배치하려 한다. 높고 낮음, 빠름과 느림, 우수함과 부족함. 이 축은 편리하다. 교육 제도를 설계하기 쉽고, 노동을 분배하기 쉽고, 평가와 통제를 하기 쉽다. 그러나 이 축 위에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사고의 방식, 감각의 결, 인식이 발생하는 서로 다른 경로들이다.
지능 담론의 가장 큰 오해는 사고가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믿는 데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재현 가능하며, 축적되는 사고만이 ‘생각’으로 인정된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직관, 감각, 반응이라는 이름으로 주변부로 밀려난다. 마치 그것들이 미완성의 사고이거나, 사고 이전의 상태인 것처럼 취급된다.
고지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사고는 대체로 구조를 따른다. 생각은 경로를 만들고, 인과를 연결하며, 스스로를 검증한다. 이들은 자신의 사고를 추적할 수 있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다시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사고 방식은 유리하다. 복잡한 문제를 관리하고, 시스템을 설계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데 적합하다. 대신 직관은 종종 이 구조 안에서 검열된다. 떠오른 생각은 곧바로 의심받고, 설명되지 않으면 보류된다.
평균 지능의 사고는 이 구조의 규범을 가장 충실히 따른다. 교육을 통해 훈련된 사고 방식, 정답을 찾는 법, 안전한 결론에 도달하는 법. 이 사고는 사회의 유지에 가장 효율적이다. 다만 이 효율성은 질문의 범위를 제한한다. 사고는 틀 안에서 움직이고, 새로운 인식은 대부분 기존 언어로 번역된 이후에야 허용된다.
경계선 지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사고는 이 축에서 가장 오해받는다. 설명되지 않고, 일관되지 않으며, 때로는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고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드러난다. 이들 중 많은 경우, 직관은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다. 깊은 통찰이나 복잡한 분석 없이도, 어떤 본질에 먼저 닿아 있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이 직관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의 도움 없이 튀어나온다. 사고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가공되지 않은 채로 드러난다. 생각이라기보다 감지에 가깝고, 분석이라기보다 반응에 가깝다. 그래서 날것이고, 그래서 종종 정확하다.
다만 이 직관은 지속되지 않는다. 추적할 수 없고, 축적되기 어렵다. 많은 경우 강한 방어기제가 함께 작동한다.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고를 차단하고, 질문을 밀어내며, 설명을 거부한다. 외부에서는 이것이 사고의 결핍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방어기제 아래에는, 구조화되지 않은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회가 요구한 사고 훈련을 충분히 받지 않았기에, 오히려 훼손되지 않은 채로 보존된 인식이다.
지능 담론은 이 차이를 하나의 선형적 비교로 단순화한다. 더 높으면 더 낫고, 더 낮으면 덜하다는 서열. 하지만 실제로는 각기 다른 방향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구조를 통해 세계를 확장하는 능력과, 구조 이전의 세계를 감지하는 능력. 하나는 쌓아 올리고, 다른 하나는 순간적으로 포착한다.
문제는 사회가 전자만을 ‘쓸 수 있는 사고’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전달되지 않는 생각은 가치 없다고 판단하고, 설명되지 않는 인식은 오류로 처리한다. 그 결과 우리는 사고의 다양성을 잃는다. 모든 생각이 같은 언어로 번역되기를 요구받고, 같은 형태로 증명되기를 강요받는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유의 시작점에서만큼은, 이 우발적인 직관이 더 정직한 것은 아닐까. 설명되기 전의 생각, 평가되기 전의 인식. 지능의 높낮이와 무관하게, 어떤 진실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도착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구조를 통해, 누군가는 방어기제 아래 남겨진 감각을 통해. 지능이란 하나의 척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인식 경로들의 지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유란, 이 경로들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차이가 존재함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