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나누려는 존재다. 구분하고, 이름 붙이고, 경계를 세움으로써 안심한다. 이해했다는 감각은 대부분 분류에서 온다. 이것은 본능에 가깝다. 위험한 것과 안전한 것을 가르고, 나와 타인을 나누며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이 본능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다. 정답이 있는 문제, 틀린 답이 있는 사고,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을 학습한다. 이분법은 효율적이지만, 그 효율만큼 시야를 좁힌다. 어느 순간부터 사고는 탐색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이미 준비된 답 중 하나를 고르는 행위로 전락한다.
그 사이 직관은 서서히 뒤로 밀린다. 직관은 설명하기 어렵고, 점수로 환산되지 않으며,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뢰받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그 직관의 세계에 산다. 아이들은 하나의 대상에서 여러 개의 의미를 본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같은 질문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거기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다. 다만 각자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성장은 보통 이 시선을 줄이는 과정이다. 다르게 보는 능력은 ‘틀린 것’으로 교정되고, 독특한 감각은 ‘비효율’로 정리된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보는 법을 확장하기보다, 허용된 방식 안으로 시선을 접는다. 안전한 사고, 설명 가능한 사고, 평균적인 사고가 된다.
그렇다면 천재는 무엇이 다른가.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일까, 더 똑똑한 두뇌를 가진 사람일까. 어쩌면 천재는 끝까지 아이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훈련 속에서도 감각을 잃지 않고, 정답의 압력 속에서도 질문을 내려놓지 않은 사람. 분류되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분류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
직관은 새로운 능력이 아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감각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너무 이른 시기에 그것을 내려놓고, 대신 설명 가능한 사고를 선택한다. 편리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대가로 우리는 다른 가능성들을 잃는다.
아마도 사유란, 다시 아이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였던 자신이 보던 방식을 조심스럽게 되찾는 일일 것이다. 세상을 다시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이전의 상태를 잠시라도 견뎌보기 위해. 그렇게 남겨진 시선 위에서, 새로운 생각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