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불안정 사이에서

by 신성규

작가 야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유서에서 “막연한 불안”이라는 말을 남겼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 같은 두려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삶을 잠식한 미래에 대한 감각. 나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또렷한 공감을 느낀다. 이해한다는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신경이 예민한 사람만이 아는 종류의 불안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류이고, 생각이 아니라 체질에 가깝다.


요즘 나는 웰부트린을 먹으며 다시 음악이 분해되어 들리는 경험을 한다. 묻혀 있던 악기들이 하나씩 살아나고, 리듬의 결이 또렷해진다. 신경이 다시 켜지는 느낌이다. 세계가 선명해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뇌가 과각성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고는 빠르게 연결되고 의미는 폭발적으로 생성된다. 머릿속은 풍요로운데 몸은 긴장한다. 목과 어깨에 신경통이 나올 정도로. 나는 이 상태를 사랑하면서도 경계한다.


반대로 정신이 안정적일 때의 나는 평평하다. 불안은 줄어들지만 창작 욕망도 함께 가라앉는다. 삶은 무난해지지만, 무난함은 나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안정할 때의 나는 번개처럼 사유하지만, 그 번개는 나를 태운다. 안정될 때의 나는 안전하지만, 안전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묻는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가, 혹은 나는 이 진폭 자체인가.


나는 가끔 과거의 광대나 무당을 떠올린다. 공동체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 보통의 신경으로는 보지 못하는 균열을 먼저 감지하던 존재들. 그들의 예민함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나의 신경도 그렇다. 남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멀리 연결하는 능력은 재능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나를 소모시키는 통로이기도 하다. 신경은 완성된 재능이 아니라 방향을 기다리는 에너지라는 생각이 든다. 방향이 없으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태운다.


가끔은 환경을 원망한다. 내가 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생존의 압박 대신 탐구의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면, 이 예민한 신경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을까 하고. 몰락한 가문이라는 서사는 나에게 분노와 동시에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환경은 조건일 뿐 결론은 아니다. 부유해도 무너지는 사람은 있고, 가난해도 자신의 신경을 구조로 바꾸는 사람은 있다. 결국 문제는 주어진 신경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있다.


요즘 나를 깊이 우울하게 만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내 지능과 감각을 충분히 쓰지 못한 채 사람들 틈에서 소모되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능성이 잠재력으로만 남아 있다가 썩어버릴 것 같은 공포.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을 이렇게 문장으로 붙잡는 순간, 나는 이미 그 가능성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불안은 나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쓰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안정과 불안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어떻게 하면 불꽃이 아니라 등불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과각성의 에너지를 스스로를 태우는 데 쓰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형태로 남길 수 있을까. 신경은 내 운명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까지 운명은 아닐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쓰이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 예민한 신경을 저주하기보다, 천천히 조율해보려 한다. 축복과 저주의 경계에서,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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