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by 신성규

내가 자란 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단순히 더 큰 도시로 가고 싶다거나,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의 공기, 골목, 익숙한 간판들까지도 나를 어떤 과거에 붙들어 두는 것 같아서다.


꿈을 꾸면 더 선명해진다. 가족에 대한 오래된 감정들이 뒤엉켜 올라오고, 지나간 연애의 후회와 상처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낮에는 괜찮은 척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밤이 되면 모서리를 세운 채 나타난다. 내가 상처받았던 말들, 무력했던 순간들, 후회했던 선택들이 이 공간에 그대로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벗어나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내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다시 시작하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그때 그 선택을 한 사람”도 아닌, 그냥 현재의 나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고향은 이상한 힘을 가진다.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붙잡는다. 동시에 가장 오래된 상처를 품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나는 지금이 아니라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 그때의 표정, 그때의 후회, 그때의 분노가 나를 덮친다. 그래서 이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도망치고 싶은 걸까, 아니면 회복하고 싶은 걸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떠나는 게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숨을 고를 틈은 줄 것 같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시선을 준다. 사람은 장소에 영향을 받고, 장소는 기억을 키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기억이 자랄 땅으로 옮겨가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과거의 설명 없이 나를 소개하고 싶다. 그냥 오늘의 나로 살아보고 싶다. 상처를 없애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매일 환기시키는 공간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떠난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나는 한 번쯤은, 나를 규정해온 배경에서 멀어져 보고 싶다. 그래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게 이 도시였는지, 아니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내 안의 감정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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