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면 나는 아이가 된다.
이 말은 단순한 감상이나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달라진다. 계산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고, 의미를 과잉 생산하지 않는다. 늘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처리하던 나의 뇌가 멈춘다. 생각은 속도를 잃고, 떠 있던 의식은 천천히 한 점으로 모인다. 현실 밖에 서 있던 감각이 제자리를 찾는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 속에서 살아왔다.
현실은 분석의 대상이었고, 사람은 해석해야 할 구조였다. 누군가의 말은 곧 의도였고, 표정은 맥락이었으며, 관계는 힘의 배치였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관찰했고, 이해하려 했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통제는 안정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점점 더 현실로부터 멀어졌다.
그녀를 만나면 그 모든 층위가 벗겨진다. 설명하려는 충동이 사라지고, 해석하려는 습관이 느려진다. 나는 비로소 바닥에 발을 딛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지금 이 순간의 온도가 또렷해진다.
그녀는 나를 현실로 꺼내주는 사람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순백의 여인을 뮤즈로 삼았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그들은 한 사람 안에서 구원의 형상을 보았을 것이다. 순백은 죄가 없는 색이다.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가능성의 색이고, 상처가 닿지 않은 새벽의 빛이다. 인간은 자신의 혼탁함을 마주할수록, 그런 색을 갈망하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녀 앞에 서면 나는 조심스러워진다. 말은 낮아지고, 태도는 부드러워진다. 나의 혼탁한 사고가 그녀의 맑음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녀를 지켜야 할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긴다.
사랑은 정말 순백을 지키는 일일까.
만약 사랑이 누군가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숭배에 가깝다. 숭배는 아름답지만, 관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사랑은 어쩌면 백지를 보존하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의 얼룩을 견디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상대를 이상화하는 대신, 그의 그림자까지 받아들이는 일. 깨끗함을 유지하는 대신, 함께 더러워질 수 있는 용기.
그녀가 나의 불안을 내려주듯, 나는 그녀의 현실을 떠받칠 수 있을까. 그녀가 나를 현재로 끌어내리듯, 나는 그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되지만, 어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랑이 나를 현실로 복원시켜 준다면, 나는 그 사랑을 다시 환상으로 변형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녀를 구원의 상징으로 올려두는 순간, 나는 또다시 현실에서 멀어진다. 그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이미지가 된다.
사랑은 구원이 아니다.
사랑은 도피도 아니다.
사랑은 같은 땅 위에 서는 일이다.
흙의 감촉을 함께 느끼고,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받아들이며,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일. 그녀가 나를 현실로 꺼내주었다면, 이제 나는 그녀를 현실에 두겠다.
같은 높이에서.
같은 무게로.
같은 땅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