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리를 잃어버린 국가

by 신성규

우리는 언제부터 모든 것을 정치로 설명하기 시작했을까.


정책은 더 이상 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의 산물이 되었고, 계산이 아니라 선택이 되었으며, 설계가 아니라 타협이 되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유리한가가 앞서는 순간, 국가는 방향을 잃는다.


정치는 본래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기능은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조정의 정치가 아니라, 침투의 정치다. 경제, 과학, 교육,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이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재단된다. 각 영역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논리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동일한 기준—지지율과 여론—으로 환원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정치는 ‘결정’에는 능하지만, ‘설계’에는 서툴다.


설계란 변수 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장기적 결과를 예측하며, 일관된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장기 설계에 취약하다. 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되는 시스템에서, 정치인은 미래보다 다음 선거를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책은 장기적 최적화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목표로 설계된다. 오늘의 지지율을 얻기 위한 선택이 반복되면서, 국가는 점점 더 단기적인 판단 구조에 갇힌다.


이 모습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금융 시장에서 익숙한 형태다.


단기 수익을 쫓는 트레이더는 끊임없이 포지션을 바꾸며 작은 이익을 쌓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구조적 우위를 가지기 어렵다. 시장을 깊이 이해하고 장기적 방향에 베팅하는 투자자와 비교할 때, 결국 성과는 뒤처진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점점 이 ‘트레이더적 국가’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책은 포지션처럼 바뀌고, 방향은 유지되지 않으며, 일관된 전략 대신 반응적 대응이 반복된다.


문제는 국가가 트레이딩 계좌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는 복리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장기적 설계와 일관된 방향이 유지될 때, 비로소 구조적 성과가 축적된다. 그러나 단기적 판단이 반복되면, 그 복리는 끊기고 비용만 누적된다. 우리는 성장의 경로가 아니라 변동성의 궤적 위에 서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다.

정책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실패다.


나는 여기서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국가의 핵심 의사결정 구조는 과연 정치에 맡겨져야 하는가.


정치인은 조정자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는 조정이 아니라 설계를 필요로 한다. 복잡한 경제 구조, 기술 시스템,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국가의 결정은 하나의 변수처럼 작동한다. 이 변수는 정교해야 하며, 일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구조를 다뤄야 하는가.


수학자는 관계를 본다. 변수와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읽어낸다. 무엇을 바꾸면 무엇이 변하는지, 그 연결을 이해한다. 국가는 결국 거대한 함수와 같다. 입력과 출력 사이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정책도 우연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기준을 세운다. 무엇이 정당한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어떤 방향이 옳은지에 대한 근본을 묻는다. 설계에는 방향이 필요하고, 방향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 없는 설계는 단지 기술일 뿐이며, 그 기술은 언제든 권력에 의해 왜곡된다.


지금의 국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잃고 있다.

구조를 읽는 능력과, 방향을 정하는 기준.


그 자리를 정치가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그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설계는 일관성을 요구한다. 정치는 타협을 전제로 하지만, 구조는 일관된 논리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정치가 되는 순간, 아무것도 제대로 설계되지 않는다.


국가는 트레이딩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를 설계하는 존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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