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타도하라.” 이 단순한 문장은 한때 혁명의 언어였다. 왕정에 맞서, 군사독재에 맞서, 자본가에 맞서 우리는 모두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누구를 향해 투쟁해야 하는가?
과거에는 명확한 적이 존재했다. 폭군, 제국, 재벌— 그들은 권력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혁명은 적의 형태를 잡는 일에서 시작되었고, 형체를 잡은 적은 언젠가 쓰러질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더 이상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AI 알고리즘, 개인화된 추천 엔진, 주주총회의 무기명 의결서, 보이지 않는 금리 정책, 심지어는 서로의 ‘눈치’마저 모두가 파편화된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푸코가 말했던 “규율 사회”는 이제 “데이터 사회”로 전환되었고, 그 안에서는 더 이상 권력의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타도할 절대자’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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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복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깊고, 더 정교하고, 더 스스로 자발적인 방식으로 복종하고 있다.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SNS 속의 타인의 성공, 외모, 언변, 팔로워 수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든다. 과거의 권력은 감시탑에서 내려다보았지만, 지금의 권력은 우리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절대자는 죽었고, 그 자리를 무한 경쟁의 분자화된 시민들이 차지했다.
현대인은 모두와 경쟁한다. 그 누구도 명확한 적이 아니고, 그 누구도 완전한 연대의 주체가 아니다. ‘적’이 존재하지 않기에 혁명의 방향도 설정되지 않는다. ‘권력’은 분산되고, ‘통제’는 내면화되고, ‘저항’은 개인의 심리적 일탈로 치환된다.
혁명은, 단지 감정적 외침이나 이미지 소비로 귀결된다. 플래카드, 해시태그, 슬로건— 이 모두는 자본이 얼마든지 흡수할 수 있는 형식들이다.
마르크스가 꿈꿨던 혁명은 계급의 형상이 뚜렷한 시대에서 가능했다. 적과 아군이 구별되었고, 권력이 무엇을 뺏고 있는지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모든 것을 뺏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갖고 있지도 않다.
모두가 손해를 보고 있지만,그 손해는 분산되어 있고,
그 고통은 ‘개인 문제’로 수렴된다. 시민은 고통받지만, 그 고통은 체제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해 되돌아간다.
우리는 지금, 정치 없는 시대, 혁명 불가능한 시대, 권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진짜 무기력이 아니다. 이것은 ‘지배 형식의 변화’다.
더 이상 타도할 권력자가 아니라, 내면화된 통제 구조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상상력은 다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혁명은 다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