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묻고 싶다. ‘원래’라는 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 반응의 기원은 정말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어릴 적부터 주입된 환경, 사회가 강요한 기대, 그리고 반복된 훈육에서 파생된 프로그래밍은 아닌가?
우리는 자신을 자신이라 믿지만, 정작 우리 대부분의 사고 구조와 반응 체계는 사회라는 시스템이 사전에 설계해놓은 코드에 따라 작동한다. 나는 이 걸 기계적이라고 느낀다.
어릴 적부터 우리의 문화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정답을 고르는 훈련을 받는다. 학교는 사유를 훈련시키지 않는다. 대신 질문하지 않는 인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부품으로서의 인간을 설계한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제공한 언어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성공’, ‘행복’, ‘정상’, ‘문제’라는 단어들이 이미 의미를 결정해버리고, 그 틀 안에서만 느끼고 사고하도록 한다. 이처럼 사회는 생각하는 법, 말하는 법, 반응하는 법까지 정교하게 설계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설계 도구는 미디어다. 사람들은 유튜브 알고리즘, 인스타 피드, 광고,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학습한다. “갖고 싶다”, “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감정은 어느새 타인의 시선 속에 내재된 욕망일 뿐, 자기 내면의 진실된 욕망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나’는 집단이 선택한 트렌드를 흡수한 존재다. 더 심하게는, 그들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오해한다.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은 어릴 적부터 반복된 인지, 보상 시스템, 사회적 승인 메커니즘에 의해 이미 내면화된 반응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패턴은 선택이 아니라 자동반사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이 아닌 사회가 설계한 감정 구조 안에 갇힌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이제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생각은 정말 내 것인가?”
“이 반응은 누가 설계했는가?”
해체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말해지지 않은 것, 당연하다고 여긴 것, 습관처럼 굳어진 사고 패턴에 날카로운 의심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설계한 존재이지만, 그 설계를 인식하고 해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철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사회의 프레임은 교묘하고 치밀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유를 통해, 그 패턴을 인식하고, 해체하고, 넘어설 수 있다. 사유는 해방이다.
아마 나는 철학과 예술이 탄압받은 이유를 사회에 기존 가치에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있기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얼핏 보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 구조를 깨는 것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 누군지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인류의 대부분은 해를 받진 않는데 탄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자들이 아마 프로그래밍 된 컴퓨터에서 일종의 바이러스 역할을 하며 진보를 이룬 것이라 보여진다. 인류 역사에서 사유는 병이 아니라 백신의 역할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