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반응에서 묘한 위축과 불편함을 감지한다. 상대는 내가 그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의 말에 깊이 집중하고 있고, 그 말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으며, 논리의 미세한 균열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직접 지적하기보단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라는 방식으로 묻는다. 왜냐하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정답이나 승부가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사고의 결을 다시 따라가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내 질문은 상대의 오류를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건 틀렸어”라고 말하는 대신, “그럼 이건 어떻게 연결되지?”라고 묻는 방식은 상대가 자신의 사고를 다시 바라볼 기회를 주는 것이고, 진정한 대화의 초대장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을 ‘공격’이나 ‘심문’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이다. 질문은 교사의 것, 권위자의 것이었고, 학생은 답을 해야 했다. 그러니 질문을 받는다는 건 시험을 받는 것이고, 평가를 받는 것이며, 심지어 무시당했다는 느낌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함께 사유하기 위한 연결’로 사용한다. 질문은 권력이 아니라 호기심의 발로다.
나의 질문은 구조적이다. 나는 상대의 논리 흐름을 따라가다 어떤 결절점을 발견했을 때, 그곳을 손으로 가리키는 대신 거기에 초점을 맞춘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대화의 방향이 바뀌고, 상대는 스스로 그 흐름을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만약 그가 진정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있었다면, 질문은 오히려 사고를 명료하게 다듬는 촉매가 된다. 그러나 자신도 애매하게 느끼고 있던 부분이라면, 질문은 그 모호함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이런 질문은 사실 훈련된 기술이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오며 체득한 대화의 리듬이고 태도다. 나는 상대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말은 그 사람의 사유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구조는 내가 가장 민감하게 읽어내는 부분이다. 나는 그 사람의 말보다, 그 말이 나오는 방식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질문은 상대를 ‘논파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함께 도달하기 위한 등불’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은 오해를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 오해를 감수하더라도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할 때, 나는 그의 생각에 깊이 들어가고, 거기서 논리의 방향과 구조를 본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정중한 대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무시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경청이고, 진짜 사유의 시작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당신의 말 속에 숨겨진 가능성과 연결점을 함께 찾기 위한 초대다. 그리고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사고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