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도록 한 가지 고민을 품고 살아왔다. 왜 사람들은 질문을 받을 때 움츠러드는가. 왜 어떤 질문은, 아무리 부드러운 어조로 건네도 누군가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지는가. 나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질문에 담긴 구조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갔다.
우리는 질문에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뷰, 검색창, 챗봇, 토론… 질문은 일상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진짜 질문, 그러니까 타인의 내면을 건드리고,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서려 있다.
질문은 권력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질문은 ‘틀릴 자유’가 없는 명령이었다. 회사의 상사의 질문은 ‘정답을 말하라’는 압박이었고, 대화 중 상대의 질문은 ‘비판의 시작’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문화 속에서 질문은 호기심이 아니라 ‘폭로’가 되었고, 이해가 아니라 ‘심판’이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하고, 틀려도 괜찮다는 환경이 거의 없었다. 틀림=실패’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았고, 질문은 이 실패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고 자체보다는 ‘정답 암기’에 길들여진 교육 탓에, 질문은 ‘무지를 드러내는 창’으로 변질되었다. 질문은 때로 무의식 깊은 곳의 회피된 문제를 건드린다.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허점을 들추는 듯한 느낌에, 심리적 방어가 자동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질문자는 ‘불편한 사람’, 혹은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질문은 본래 사랑의 형식이자 이해의 기술이다. 무언가를 묻는다는 건, “나는 너를 더 알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너를 가르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이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너의 관점을 빌려 내가 몰랐던 세계에 닿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질문이 권위가 아닌 초대라는 것을 서로가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질문이 틀림을 증명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사유하자는 제안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틀려도 웃으며 다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놀이였고,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그때의 감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질문은 다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질문은 결국 두 가지를 요구한다. 진심으로 묻는 자의 용기,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신뢰. 이 두 가지가 맞닿는 곳에서, 비로소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