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들으며 고찰

by 신성규

나는 문득 상상해본다.

로봇 팔로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그 손짓 하나에 맞춰, 무대 위의 연주자들마저 모두 기계로 이루어진 세상.

완벽한 피치, 완벽한 템포, 완벽한 동기화.

음 하나 흔들리지 않고, 실수 따위는 없다.

모든 현악기와 관악기가 동시에 숨 쉬듯 움직인다.

마치 기계 공정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그 풍경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그토록 완벽한 음악 앞에서

나는 과연 감동할 수 있을까?

혹시 그 완벽함이 내 마음까지도 정밀하게 예측해버리진 않을까?

음악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예측 불가능한 떨림,

그 떨림을 타고 오르는 인간의 실수와 긴장,

그 속에서 반짝이는 한순간의 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가수들의 라이브를 꺼린다.

음이 흔들리거나, 긴장한 표정,

감정이 너무 올라와서 음이 새거나,

실수할까봐 내가 대신 숨을 죽인다.

관객이 아니라 구조대처럼 공연장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싫다.

그렇기에 기계 지휘자와 로봇 연주자라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완벽한 정확성, 안정감, 예측 가능한 음정.

관객은 실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안심하고, 혹은 심심해하며 듣기만 하면 된다.


그때 문득 묻게 된다.

불완전함이 사라진 음악은 정말 음악일까?

음악은 수학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들 한다.

음계와 박자와 화성으로 모두 기록할 수 있다고.

그러나 종이에 그려진 음표는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음악의 설계도일 뿐이다.

그 설계도를 불완전한 인간의 손끝이,

때로는 떨리는 심장박동이,

그날의 공기와 관객의 숨결이 녹여서

비로소 음악이 된다.

관객의 긴장감도 음악의 일부일지 모른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는 효율성과 창조성 사이에 놓여 있다.

기계는 정확하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기계는 무한 반복이 가능하다.

인간은 한 번뿐인 실수를 안고 산다.

그 실수는 아름다움이 될 수도, 파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파국마저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것을,

기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기계가 만들어낸 음악은

사람의 귀를 만족시키는 데 최적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늘 뭔가 부족하다.

마치 정교하게 인쇄된 미소가

실제의 미소만큼 따뜻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흔들림을 사랑한다.

그 흔들림 속에 숨겨진 용기,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내가 음악을 들으며 긴장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 완벽함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

바로 그 실수와 긴장이야말로

인간의 음악을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떨림이라는 걸.


불완전함이 사라진 음악은 정말 음악일까?

라이브의 흔들림 속에 숨겨진 인간의 떨림,

손끝의 땀, 음색의 미세한 불안.

그것들이 사실 음악의 심장 아니었을까?


완벽한 음악에는,

완벽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설 자리가 있을까?

나는 그 경계에 서서 여전히 묻는다.

음악이 인간을 닮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음악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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