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왜 생각하지 않는가?

by 신성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뉴스를 읽고, 댓글을 보고, 나름대로 판단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판단은 정말 ‘자기 것’일까? 인터넷 댓글이나 기사 반응은 특정한 기획 아래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국정원의 댓글부대, 드루킹 사건, 정치 커뮤니티의 여론 조작 등은 단순한 정치 팬덤의 열광이 아니라, 의도된 ‘심리 조작’의 일부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조작을 사람들이 메타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정서적 반응에 의해 움직인다. 우리는 이제, ‘말이 옳은가?’보다 ‘이 말이 나에게 기분 좋게 들리는가?’에 의해 진실을 판단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군중 심리의 철학적 원인을 추적하고자 한다.


국정원의 댓글부대, 드루킹 사건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문장을 설계했고, 감정을 유도했으며, 군중은 그 말에 감염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적 감염병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말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저 반응했고, 반응은 다시 또 다른 반응을 낳았다. 사유는 점점 그 그림자조차 사라졌다.


정치권력은 이미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군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들에게 ‘반사적 문장’을 던져주는 것으로 여론을 설계한다.


이 방식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유사하다. 자극 – 반응의 구조. 사유는 사라지고, ‘문장에 감염된 반응’만이 남는다. 이때 군중은 사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인간이 된다.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하는 건, 이런 조작의 흔적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메타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자신이 보고 싶은 기사, 자신이 듣고 싶은 주장, 자신이 믿고 싶은 진영만을 반복해서 소비한다. 말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말이 내가 원하던 감정을 충족시켜주는가?”이다.


그들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말에 반응할 뿐이다.



언어에 사로잡힌 인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언어는 개인의 세계를 넓히는 수단이 아니라, 권력이 설정한 세계 안에 갇히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공정, 자유, 정의, 혐오… 이 단어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윤리도 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정파적 언어기계는 이 단어에 ‘정치적 주인’을 부여했다. 이제 우리는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단어에 의해 쓰인다.


예를 들어, “공정”이라는 단어는 특정 정치세력의 구호가 되며, 그 순간 ‘다르게 정의된 공정’을 말하는 사람은 배척된다. 즉, 단어가 가진 의미는 고정되며, 그 위에서 사람들은 비판 없이 복제만 할 뿐이다.


이는 마치 언어의 피식민화와도 같다. 사람들은 단어를 쓰지만, 그 단어에 담긴 권력의 의도는 보지 못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사유를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의 의도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훈련되지 않은 인식의 문제다. 그들이 받은 교육은 사유하는 법이 아니라, 정답을 고르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1번과 2번 중 하나를 고르는 훈련은 잘 받았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에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


뉴스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방아쇠가 되었다. 자극 – 분노 – 반응. 우리는 뉴스 자체보다 뉴스에 달린 댓글이 어떻게 분위기를 조성하는지를 더 먼저 읽는다. 결국 생각은 사라지고, 정서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정서는 반복될수록 강해진다. 생각은 훈련되지 않으면 약해지지만, 감정은 반복될수록 굳어진다. 그렇게 점점 더 확증편향적으로, 사유 없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 되어간다.


정치는 타인의 관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서사만 반복하는 것으로 변했다. 미디어는 판단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유도하는 설계도가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뉴스나 말을 ‘생각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소비하고 배설할 감정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생각 없는 감정만이, 가장 쉽게 통제된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 감정만 소비하는 인간


이쯤에서 되묻고 싶다. 사람들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감정적 합의와 확신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일까?


대중은 정보를 교차 검증하지 않는다. 발화자의 의도를 추적하지 않는다. 문장의 이면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보를 ‘해석’하지 않고 ‘소비’한다. 그 소비는 감정을 통해 이뤄지며, 그 감정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유도된다.


나는 때때로 내가 너무 냉소적인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단지 나보다 느릴 뿐인 건 아닐까 자문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금세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느린 것이 아니라, 다르게 훈련받았고, 다르게 살아왔으며, 사유 자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 메타인식의 윤리


나는 이제 사유 없는 말을 보면 경계심부터 든다. 언어가 아닌 감정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말이 타인의 문장을 반복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메타인식을 통해만이 그 감정의 구조를 해부할 수 있다. 그 해부가 고통스럽더라도, 그것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사라진다.


사유는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메타인식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허다.

우리는 그것을 잃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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