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예술적 기질을 보며 고찰

by 신성규

섬세한 감수성은 언제나 양면을 지닌다.

예술가가 그것을 음악이나 언어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천재’라 부른다.

그러나 감수성이라는 날선 칼날이 현실의 언어와 조우하지 못하고

차가운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그것은 파괴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나는 일부 연쇄 살인마들에게서 예술가의 감각을 본 이유다.


우리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되, 타락, 퇴폐, 불안정한 쾌락, 사악함의 감각을 통해 노래했다.

그의 시는 향기롭지만 썩은 냄새가 나며,

그의 언어는 황홀하지만 곧 죽음을 향한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영혼의 상처에서 꽃이 피기를 원했다. 그것은 바로 악의 꽃이다.”


보들레르는 죄의식과 아름다움, 향락과 허무, 감각과 절망이

서로를 배반하면서도 끌어당기는 모순된 감정 안에 진정한 예술성의 밑바탕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악’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꽃’이라 부르며

그 안에서 인간 감정의 극한을 감지했다.


나는 말하고 싶다.

모든 파괴가 감각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감각의 과잉, 감수성의 범람, 공감 능력의 폭주가 어떤 사람들을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있다.


우리는 연쇄 살인마들을 볼 때, 단순히 “이상한 놈”, “미친놈”이라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실은 내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 감각이 표현될 출구를 찾지 못해 흉기로 변했을 뿐이다.


사회가 감수성에 대한 언어를 가르치지 않을 때,

예민한 자들은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괴물’이 된다.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은 감정을 말하지 못한 인간의 최후의 형상일 뿐이다.


그들은 둔감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 방향이 비틀어진 것일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나치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에 민감하며,

고통, 외로움, 증오, 아름다움조차도 강렬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잉된 감각은 사회 안에서 흡수되거나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자기 세계 안에서 뒤틀린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현실의 부조리, 인간의 허무, 사랑의 결핍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감각을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변환해내는 사람들은 작가, 화가, 음악가가 되며,

그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고 ‘현실’에 투사하는 사람들은

때로 파괴자로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수성” 그 자체는 무죄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 감수성을 표현할 언어를 주지 않은 것이다.

감각이 풍부한 자들이

세상의 무심함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고,

그 고립이 증오로, 파괴로, 혹은 살해 충동으로 비틀리는 순간.


그건 단순한 범죄라기보단,

감정적 세계를 지킬 언어를 잃어버린 자의 비명이다.


보들레르는 ‘악’을 통해 예술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 묻는다.

우리 사회는 아직 ‘악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우리는 감수성의 이면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예술로, 언어로, 음악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감각이 너무 예민했던 인간이

자신을 표현한 후에야

그의 예술성을 ‘뒤늦게’ 알아채는가?


예술성은 본디 중립이다.

빛과 어둠 중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다.

문제는 그 감각을 받아주는 사회, 그리고 해석해주는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사라질 때, 우리는

끔찍한 비극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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