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란 무엇인가?
종교는 흔히 악마를 외부의 존재로 묘사한다.
유혹하는 자, 파괴하는 자, 타락시키는 자.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로 악마는 외부에 존재하는가?
나는 믿는다.
악마란 사실, 파괴 충동이 극단에 다다랐을 때 인간 내면에서 깨어나는 상징이다.
그것은 마음이 망가질 때 찾아오는 홀림의 감정,
그러나 동시에, 아주 이성적인 명료함을 가지고 행동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악마에 씌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파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감각의 논리화이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악마적 사고가 비이성적이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오히려 악마의 논리만큼 정밀한 체계는 없다.
악마적 사고는 비이성이 아니라 고통의 이성이다.
악은 충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정확하고 무자비한 논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어차피 인간은 타락했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
‘파괴가 정화다.’
이런 명제들은 괴물들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세계의 구조를 이해한 후 도달하는 결론이다.
그래서 악마에 홀린 듯한 상태는,
사실은 내면의 절규가 논리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끔 파괴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세상의 질서가 너무 부조리할 때,
어떤 이들은 ‘악의 시선’을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선은 차갑고도 명확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악마적 시선을 억압하거나 두려워하는 종교의 태도에 있다.
악마를 외부로 몰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악마를 어떻게 꺼내어 마주할 것인가.
그것이 오히려 진짜 영혼을 구원하는 태도여야 한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바랄 때,
그것은 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를 직면할 용기를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
악마가 들어왔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에서 오래도록 고통받았다는 신호다.
그 고통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걸어야 한다.
왜 왔는가.
어디서 생겨났는가.
무엇을 보라고 말하는가.
이 대화를 회피한 이들은, 결국 ‘홀림’에 사로잡혀 자기 파괴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그 악마와 이름을 붙여 대화한 사람은,
그것을 예술로, 철학으로, 사랑으로 바꿔낼 수 있다.
악마는 내 안의 고통이 구조화되었을 때의 이성적 형상이다.
그것을 직면하고 언어화하지 못하면,
우리는 파괴되며,
직면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된다.
악은 감정의 무질서가 아니라, 감정의 구조 없는 이성이다.
그리고 철학이 할 일은, 그 구조 없는 이성을 다시 말로 가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