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부코스키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
“Don’t try.”
를 보며 냉소와 패배감만을 읽었다.
‘인생을 포기하라는 건가?
노력하지 말라는 건가?
어디 한심하게…’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짧은 문장에서 종교적 해탈,
혹은 삶에 대한 궁극적 이해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자기 삶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던 사람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가리키는 포기는, 도망이 아니다.
이것은 다음을 전제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인생을 조작하려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
억지로 쥐고 있던 것을 손에서 놓아주는 것.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초월적 관점의 회복이다.
장자의 무위 사상과 통한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두는 경지를 말한다.
이 맥락에서 보면 부코스키의 “Don’t try”는
“억지로 되려 하지 말라”는 존재론적 겸허함이다.
예술이든 삶이든, 억지로 이루려 할 때 그것은 조악해진다.
그는 말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예술을 이룬 게 아니라, 예술이 나를 통해 흘렀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려는’ 순간
자기 존재를 타자화하고, 조작하려 든다.
이때의 삶은 무거워지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나 삶을 ‘하려 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삶 그 자체로 돌아간다.
이건 불교의 ‘집착 없음’과도 통하고,
기독교적 ‘자기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과도 통한다.
포기란 단념이 아니라 해방이다.
억지로 살지 않을 자유는,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은총일지 모른다.
“Don’t try”는
애써 살지 말고, 진실하게 살아라는 뜻이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무기력이 아니라, 흐름에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신뢰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하고,
너무 많은 것을 쥐려 하고,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충분하다.
포기하면 편하다.
그러나 그건 ‘모든 걸 놓는 것’이 아니라,
‘쥐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아는 것’이다.
부코스키의 문장이 오래도록 울리는 이유는,
그 안에 예술과 삶, 무위와 해탈, 패배와 구원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