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마일리지: 나는 쓰고 너는 달리는 이유

by 장서나

책을 읽다 보면 따라 쓰고 싶은 문장이 있다.

밑줄만 긋고 넘어가기에는 아쉬워서

결국 내 손으로 꾹꾹 눌러쓰게 되는 글.

그냥 따라 쓰는 게 아니다.

단어 하나하나 호흡을 따라 마음에 새기며

그 글자들을 내 것이 되게 한다.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다.


요즘 유행이라는

필사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노트에 좋아하는 만년필로

쓱싹쓱싹 글을 쓴다.

손가락이 아프고 손목이 뻐근하다.

그래도 힐링이 된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쓰는 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뭘까, 그건.

왜 지금 우리는

다시 손을 움직이려 하는 걸까.

무엇을 잃어버렸길래

더 찾게 됐을까.



매끄러운 일상이 빼앗아 간 것


지금은 편리함의 시대다. 모든 것이 사용자 맞춤으로 편리함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문 앞까지 뭐든 다 배달해 주며, 복잡한 책이나 영상도 인공지능이 1초 만에 요약해 준다. 이런 매끄러운(seamless) 일상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았을까. 마찰이 없는 길 위에서 우리는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은 『경험의 멸종』에서 현재의 심각성을 역설하고 있다. 단순히 직접 경험의 멸종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나아가 다양한 측면에서 경험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대면 상호작용, 손으로 하는 일, 기다림과 지루함, 감정 아웃소싱, 기술로 매개된 쾌락, 장소 대신 개인화된 공간.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들은 우리 삶 전체다. 직접 경험하고, 사람을 대하고, 손으로 작업하고, 기다리고, 감정을 나누고,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는 건 삶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체적으로 가혹한 경험을 덜 하고, 신체적 한계에 그만큼 자주 직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편해졌다는 것은 우리 몸의 불가피한 쇠퇴를 수용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일 수 있다. (…) 손 글씨와 같이 전신적, 육체적 기량이 필요한 일이나 몸과 마음의 조화, 인내, 반복을 요하는 활동을 피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인생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배어 있는 몸과 마음의 습관에 뒤따르는 당연한 결과이다. 기술로 비효율성을 제거하면서 매끄럽고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우리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도전이 나타났을 때 견디기가 훨씬 더 힘들어진다.


편리함을 얻은 대가로 우리가 지금 뭘 버리고 있는 건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기술이 지워버린 그 '불편한 마찰'이 사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하며 숭고한 가치인 것이다.


살아있다는 감각.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리바운드, 실패를 전제로 다시 뛰어오르는 간절함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그걸 극복한 사람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것이다. 영화 <리바운드>를 보면서 '나는 언제 내 한계를 느꼈었고 그걸 어떻게 극복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 농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구색만 갖춘 팀이었지만, 악착같은 집념으로 전국 대회에서 기적 같은 성과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제목 '리바운드'는 농구에서 슛이 실패했을 때 시작된다. 공이 링을 맞고 튕겨 나오는 순간, 누군가는 포기하지만 누군가는 다시 뛰어오른다. 공을 다시 낚아채서 어떻게든 점수를 내겠다는 간절함 때문이다. 안타까울 만큼 처절한 주인공들의 절실함을 좇다 보면, 단순히 농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서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다.


지금의 어른 세대는 한계에 가까운 불편함을 '디폴트값(기본값)'으로 살았다. 다리가 아파도 엄마를 따라 걸어야 했고, 덥고 추워도 어쩔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힘든 삶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극기 훈련'이 있었고, 학교 교실, 복도는 학생들이 청소하고 광을 냈다. 개개인의 한계 따위는 고려되지 않고 '그냥' 했다. 그래서 어른 세대는 지금 편리해진 세상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아이 세대가 쾌적하고 편하게 자라는 것은 맞지만, 대신 너무나 큰 것을 잃고 있다. 편함이 '디폴트값'인 세대에게 힘듦과 불편함이 영영 없을까? 그럴 때 이 세대는 그걸 견뎌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며 실패의 충격을 미리 완충해 주는 환경은 이 세대를 작은 충격에도 금이 가는 유리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또 그 한계를 넘는 법을 배운다. 한계를 극복해 본 경험이 없다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지 못해 쉽게 무너져 내리게 될 것이다.


어른 세대의 삶은 고통이었으나 동시에 축복이었다. 내 몸의 한계를 조절하며 끝까지 버텨내는 인내심,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이런 축적된 경험을 '경험 마일리지'라고 부르고 싶다. 경험 마일리지는 삶을 살아가며 직접 쌓아가는 보너스 점수다.


경험 마일리지를 쌓지 못하게 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경험 마일리지를 쌓기 위한 본능적인 저항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주말이면 여러 활동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평소에는 예체능 학원을 보낸다. 하나하나 연습해 가며 자기 몸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지루한 반복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넘어설 수 있게 한다. 몸으로 움직이며 땀을 흘리고, 손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단지 기술을 연마하기 위함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아이의 삶에 '마찰'을 도입하기 위해 하는 활동이다. 비효율적인 반복 속에서 아이들이 경험 마일리지를 쌓으며 성장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본능적 노력은 어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최근 유행하는 '필사'나 손뜨개' 같은 취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는 기술이 거세해 버린 감각을 되찾으려는 저항처럼 느껴진다. 0.1초 만에 검색 결과가 나오고 좋은 글을 손쉽게 수집할 수 있는 세상에서, 한 문장을 오랜 시간 동안 적어 간다. 수도 없이 많은 기성품이 넘쳐나는데, 마음에 드는 뜨개실을 찾아내어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온기를 꿋꿋이 엮어낸다. 효율성의 잣대로 보면 이보다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비효율 속에서 더 깊은 만족을 느낀다. 물성(物性)을 오롯이 느끼는 그 경험을 통해 자발적으로 경험 마일리지를 쌓는다.


최근의 달리기 열풍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예전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사람이 특별했다. 요즘은 평범한 회사원들도 주말에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원정 달리기를 한다. 심지어 100km 울트라마라톤도 달린다. 평범한 수의사인 내 친구도 얼마 전 18시간을 꼬박 달려 울트라 트레일 러닝을 해냈다.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겠지만, 친구가 많은 고뇌와 고통 끝에 얻은 것은 완주 기록이 아니었다. 그건 결국 '나는 끝내 해냈다'라는 경험이었으며, 이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 삶의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한 번 넘어 본 사람은 그 감각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달리고 또 달리게 되는 것이리라.


이 비효율적인 활동들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기계에 내준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조용한 저항이다.



마찰이 없으면 전진할 수 없다


경험 마일리지는 효율성의 논리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편리함을 버리고 얻은 '견디는 힘'이자 '생존의 근육'이다. 『경험의 멸종』에서 강조했듯, 매끄러운 삶에 다시 마찰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에 너무 익숙해지기 전에, 직접 만나고 소통하고 느껴야 한다. 불편함과 지루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구시대 얘기처럼 들리는, '미덕Virtues'과 '관행Practices'을 되살려야 한다.


마찰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다.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발바닥에 닿는 거친 지면의 저항이었다. 경험 마일리지는 불확실한 삶에서 다시 리바운드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경험 마일리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엄마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생각했다.

나아가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경험 마일리지가 충분한가.

남은 인생을 잘 나아갈 힘이 있는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따라가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시대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의 새로운 삶

마음껏 느끼고 있는가.

나를 인간답게 하는

모순 불완전함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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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노트]

미덕은 기술과 마찬가지로 먼저 연습함으로써 얻는다. 어떤 것을 배워야만 그것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직접 행하면서 배운다. 예컨대 건축가들은 집을 직접 지어보면서 건축가가 되고, 키타라 연주자들은 키타라를 직접 연주하면서 연주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행위들을 실행할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행위들을 실행할 때 절제 있는 자가 되며, 용기 있는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현대지성, 2022, 제2권 제1장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반복된 실천을 통해 몸에 새겨지는 습관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이 대신해 주는 정답이 아니라, 내 몸을 직접 써서 겪어내는 비효율적인 반복만이 우리를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만듭니다.


손가락이 아파도 쓰고 엮고,

몸이 힘들어도 또 달리는 이유는

잊기 쉬운 감각과 미덕을 직접 되찾아 오기 위함일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생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때로는 비효율적인 삶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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