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시절 사내교육을 몇 주 받던 중 고된 교육이 있는 날(실무교육으로 선배들에게 엄청난 핀잔을 듣는 날)들은 늦은 오후가 되면 빛이 사라진 눈동자로 멍하니 먼 산을 한참 바라본다. 그러면 동기 오빠들이 한 마디씩 한다.
"쟤 또 멍 때린다"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할 때라 잘하자 다짐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싫은 소리 하나 들으면 그대로 정신줄을 놓친다.
그 때는 뇌를 놔버리는 날들이 잦아졌다.
지금의 난 후배들이 많아진 선배로 지내고 있다. 내년 3월 2일이면 이 회사에 다닌 지 딱 20년이 된다. 예전처럼 뇌를 놔버리는 날들은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곰인 줄 알았는데 여우였다라든가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색이던 순전한 마음은 언젠가부터 뻔뻔한 정신으로 여러 가지 색을 입혔다. 그때, 그때 상황에 어울리는 색이 언제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특히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전화 통화 목소리와 그에 따른 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상급부서 직원과 통화할 때는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톤으로, 협업부서 직원과 통화할 땐 너 없으면 난 안돼 라는 애절함의 톤으로 외부 회사 직원과 통화할 땐 프로의 향이 묻어나는 부심의 톤으로. 그렇게 분주한 색을 내놓느라 나의 뇌도 쉴 틈이 없다.
그래서 난 가끔 일부러 뇌를 놔버린다.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도, 남보다 모질라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도 모두 내려놓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라도 하면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급급했던 뇌가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했거니 하는 자기만족으로 다시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