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봐와서, 또는 워낙 사람 좋아서, 혹은 뭐든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대하기가 쉽고 일을 맡기기도 수월하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할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딱 집히는 건 세 번째. 뭐든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
거기에 네가 아니면 안 된다, 너라서 맡긴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해낼 것이다라는 내 옆에 딱 붙어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툭 건들기만 하면 바로 넘어가는 쉬운 사람이라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걸 또 해내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스스로가 대견해하는 걸 보면 난 정말 세상에서 제일, 제~~~ 일 쉽다. 그게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할지 모른 채로.
"오전에 A 업무 다 끝냈어?"
오전에 난 나의 업무와 더불어 누군가의 업무도 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커피 두 잔을 연거푸 마시며 일만 했다.
"아직도 그걸 안 하면 어떡해?"
상사의 표정이 곧 굳어지고 이내 차가운 기운이 내게로 뻗친다. 순간 억울한 마음이 튀어 올라
온 얼굴에 열이 퍼지기 시작한다. 몇 번 들었던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퍼진 열이 오래간다.
'아직도요? 해놓은 건 뭐 마법처럼 된 건가요? 저한테만 지시하지 마시고 저짝에 있는 불편한 친구한테 좀 지시하면 안 되실까요?'
오래전 입사할 때부터 보았고, 그래서 편하고, 지시하면 다 하는 이 삼박자가 맞는 애는 나오는 말을 꾹꾹 누르기 바쁘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앞길 창창한 미래를 그리며 공손한 말을 꺼내놓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사각사각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히기 시작한다.
"됐어! 내가 해!"
안 지 얼마 안 되고, 그래서 불편하고 지시하면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은 직원한테는 어떠한 말조차 못 하지만 반대인 사람한테는 쉽게 쏘아붙이는 상사가 미워진다.
어쩌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건 나인데... 그저 추켜세워준 것에 취해 내 업무가 아님을 말하고, 당당하게 해당 담당자에게 줬어야만 하는 기회를 나 스스로 차버린 것을.
그렇게 나를 탓하며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나이를 헛 먹은 것 같은 이 좌절감은 늦은 밤이 되어도 가시질 않는다. 못났다는 마음이 더해 잠도 안 온다.(그래요! 나 이렇게 소심해요!)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미친 척하고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내 담당이 아닌 건 바로 뻥 차버려야 하나?
아까 가슴 한가운데에 긁힌 상처들이 엉켜있어 오늘 밤 안으로 풀릴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