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나와 사마르칸드의 정체성 대리, 위구르 식민지 전락에 일조
우리는 현대 #우즈베크 민족을 단순히 한민족과 유사한 단일민족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은 근대 무렵까지 3개의 봉건 왕조(히바, 부하라, 코칸드)로 나뉘어 있었다. 이 나라들은 각각 호레즘, 마와라안나흐르 오아시스, 페르가나 계곡에 위치했으며 서로 다른 문화적 특색을 바탕으로 각자의 법과 제도에 따라 운영되었다. 한반도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고려·조선을 거치며 단일 한민족 문화권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은 줄곧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었으며 현대의 '우즈베크' 또한 매우 인위적으로 설계된 민족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東은 계곡인(vodiylik), 西는 오아시스인(vohalik)으로 갈려... "한국 영·호남 갈등? 가소롭다"
오늘날 지자흐·사마르칸드·수르한다리야·카시카다리야·부하라州를 포함한 우즈베키스탄 서부(마와라안나흐르) 권역은 ‘오아시스(voha)’, 오쉬·안디잔·페르가나·소그드(후잔드)州 일대는 ‘계곡(vodiy)’으로 불리며 현대 우즈베크 사람들은 두 권역 출신자를 각각 오아시스인(vohalik)과 계곡인(vodiylik)으로 분류하고 서로를 이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한다. 이 같은 정체성 분리 현상은 역사적으로 오아시스 우즈베크인의 정착 시기가 계곡 우즈베크인에 비해 뒤쳐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곡인에 해당되는 페르가나의 우즈베크인은 중세 카라한 시대(840~1212)부터 유목민의 삶을 청산하고 페르가나 주변에 터를 잡고 발라사군, 우즈겐, 안디잔, 악시켄트 같은 여러 도회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부하라-사마르칸드 우즈베크인은 13세기 몽골군의 침입 이후에야 우즈베키스탄 땅에 들어왔고, 유목민 특유의 씨족(qabīla) 단위 공동체를 유지하며 도심이 아닌 교외 변두리에 머물렀다. 이미 부하라-사마르칸드 도시들에는 타지크족이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우즈베키스탄 동부의 도시문명은 투르크인에 의해 번성했지만 서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사르트'로 불렸던 동부 우즈베크인들
본래 페르가나 계곡에 살던 우즈베크인들은 과거엔 우즈베크가 아닌 '사르트'로 불렸다. (사르트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상인'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오늘날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족을 자신의 동족으로 여겼다. 페르가나와 타림 분지 모두 카라한 시대부터 하나의 투르크-무슬림 문화권으로 발전한 까닭이다. 반대로 오아시스 우즈베크와 계곡의 사르트 집단 사이의 공동체 의식은 매우 희박하였다. 이러한 상호 간의 거리감은 1842년 페르가나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페르가나를 침공한 부하라의 아미르 나스룰라(재위 1827~1860)는 코칸드 汗國의 군주 무함마드 알리 한을 비롯한 왕족 전체를 붙잡은 뒤 어린이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처형시켰다. 또 무함마드 알리 한의 부인이자 汗國의 왕비였던 한 파드샤(Xon Podsho)를 자신의 궁정에 데려가 2년 동안 희롱한 뒤 싫증이 나자 참수형에 처했다. 중앙아시아 역사에서 이렇게 잔혹한 일족 말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즉, 당시 부하라-사마르칸드와 페르가나 사이의 앙금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10년대부터 양측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체성 논쟁 시작돼 "너희는 개 xx이다"
사마르칸드 출신의 자디드 지식인 마흐무드호자 베흐부디(Mahmudxo'ja Behbudiy, 1875~1919)는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발행된 『거울(Oyina)』 잡지에 「사르트 어휘는 불분명하다」라는 제목의 논설 여섯 편을 기고했다. 여기서 베흐부디는 사르트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독자들에게 ‘우즈베크’ 명칭을 쓰도록 권했다. 이 같은 오아시스인 중심의 反사르트 이론은 후대 우즈베크 민족 설계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베흐부디를 비롯한 사마르칸드 지식인들은 페르가나의 우즈베크인을 지칭하는 '사르트' 명칭이 '노란 개(sariq it)'를 의미한다며 대단히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여론전을 펼쳤다.
본래 사르트 논쟁의 시작은 19세기말 『투르키스탄 新報(Turkestanskiye vedomosti)』 신문에서 제정 러시아의 유명 역사학자 #바르톨드(V. V. Barthold)와 사마르칸드 총독부 통역관을 지낸 카자흐족 역사학자 셰르알리 라핀(Sherali Lapin) 사이에서 촉발됐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이스마일 가스피랄리(Ismoīlbek Gaspirali), 자키 왈리디(Zakiy Validiy To'gan)처럼 凡투르크주의에 고무된 타타르·바시키르 지식인들이 『번역자(Tarjimon)』, 『위원회(Sho'ro)』 같은 타타르어 신문·잡지를 통해 투르크 세계로 확장시켰다. 여기에 평소 ‘사르트’ 명칭의 광범위한 사용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아시스 지식인들까지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정체성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페르가나 지식인들은 사르트 종족성을 부정하는 베흐부디의 무례하고 과격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대신, 『페르가나의 외침(Sadoyi Farg'ona)』 신문의 짤막한 사설을 통해 한 차례 대응했을 뿐이다. 이미 제정 러시아 치하에서 행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명칭을 굳이 스스로 '변호'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르가나의 사르트인은 베흐부디의 덫에 걸려들지 않고자 줄곧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즉, 사르트 논쟁은 새로운 투르크 민족국가 성립을 앞두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사마르칸드 측의 정치적 선전운동에 가까웠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상황 역전돼... "오아시스 파벌의 영구집권 시작"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볼셰비키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면서 페르가나 사르트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된다. 이 시기 페르가나는 수차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꿈꾸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끝내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다. 더 불행한 사실은 사르트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이슬람'과 '상공업' 정체성이 모두 부르주아적 反혁명주의로 낙인찍히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르트 부호들 역시 그대로 몰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1920년대부터 부하라-사마르칸드 우즈베크 종족이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표 민족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여기에 스탈린의 대숙청(1937~38) 기간 동안 타슈켄트와 페르가나의 사르트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정치권력은 온전히 오아시스인에게 넘어간다.
특히 지자흐 출신 샤라프 라시도프(Sharof Rashidov, 1917~1983)는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을 지내면서 페르가나 정치인들을 전부 숙청한 바 있다. 1991년 독립 직후부터 대통령직에 오른 사마르칸드 출신 #이슬람_카리모프(Islom Karimov, 1938~2016) 역시 2016년까지 장기집권을 이어가며 나망간 이슬람 세력을 척결하고 2005년 안디잔 反정부 시위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페르가나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억눌렀다. 카리모프를 승계한 현 대통령 샤우캇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1957~) 또한 지자흐-사마르칸드 파벌에 속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영부인 지라앗 여사는 물론이고 국가안전부(Davlat Xavfsizlik Xizmati 일명 DXX)의 수장으로서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는 둘째 사위 아타벡 우마로프(Otabek Umarov, 1984~) 역시 코칸드 출신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아들은 2009년생으로 너무 어린 까닭에 후계자로 올라설 확률이 희박하다)
타슈켄트로 침투하는 오아시스인들, "오아시스인이라 부르면 주먹 휘둘러"
최근 #타슈켄트에는 카시카다리야·수르한다리야州 출신 우즈베크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사실상 택시기사의 3분의 1 이상을 오아시스 출신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타슈켄트 토박이 기사들은 계곡 출신 기사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나 오아시스 출신 기사들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하루는 필자가 농담 삼아 "당신 카시카다리야 출신 아니요?"라고 묻자, 타슈켄트 토박이 기사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가만두지 않겠어"하며 화를 낸 적도 있다. 이미 타슈켄트 시내의 칠란자르와 세르길리 구역은 오아시스인들이 정착하면서 '새로운 카시카다리야(Yangi Qashqadaryo)'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타슈켄트로 이주한 오아시스인들은 보통 우즈베크어만 구사할 수 있고 러시아어 사용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타슈켄트 토박이나 러시아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독자적인 공동체를 꾸려 살아간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즈베키스탄의 東西 갈등은 어찌 보면 한국의 영·호남 갈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처럼 지방인구의 수도권 유입이 꾸준히 진행된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오아시스 파벌의 정치권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본 포스팅은 2025년 4월 19일 #중앙아시아학회 춘계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근대 투르키스탄 정주 무슬림 정체성 연구: 사마르칸드와 페르가나의 '사르트' 논쟁』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