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아버지를 둔 제니는 아름답고 한적한 스코틀랜드 폴커크의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는 나의 영국인 친구이다. 치매 초기의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대신 아버지의 작은 집을 팔아 큰 집을 구입 후 함께 살며 다소 불편해도 아버지를 보살피며 사는 탓에 늘 일손이 필요했던 그녀는 식물 세밀화 공부를 하려고 등록한 영국식물화 협회에서 개최한 세미나를 위해 영국에 가게 된 나와 연이 닿았고 그렇게 우린 8년이 넘은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처음 제니를 알게 된 건 제니네 식구가 여름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봐줄 사람을 구하면서였다. 제니가 키우던 늙고 병든 까만 고양이 버니를 일주일간 돌볼 캣 시터를 구한다는 하우스 시팅 웹사이트의 광고를 보고 왠지 모를 이끌림에 연락을 했고, 인터뷰로 전화 통화를 잠시 한 뒤 합격점을 받아 며칠 후 그녀의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학연수를 했던 이스트본과 런던, 브라이튼이 있는 잉글랜드 남부에만 머물렀던 터라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켈트족의 기를 느낄 수 있는 스코틀랜드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일이 잘 풀려 행운이라 여기며 설레는 마음으로 에딘버러로 가는 장거리 버스에 올랐다.
통유리창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제니의 썬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버니. 오래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다녀온 모두가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찬탄하는 에딘버러에 꼭 가보고 싶었기에 아홉 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에 지독한 차멀미를 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순간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에딘버러의 고고한 모습에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인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에딘버러의 풍경과 웅장한 건축물은 충격적일 만큼 우아해 나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었고, 언젠가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보리라 다짐했다(그리고 2017년부터 만 4년을 에딘버러에서 살았다). 신기하게도 스코틀랜드는 마치 전생에 내 고향이었던 것처럼 굉장히 친숙하면서 낯익었고, 난생처음 만난 제니 역시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반갑게 안아주며 맞아주었다.
햇볕쬐려고 잔디밭위에 벌러덩 드러누운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모자에 양산까지 쓰는 한국인은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16세기, 이곳은 쓰레기와 오염수로 악취가 진동했던 호수였다. 이 호수에 빠뜨려 몸이 뜨면 마녀로 판명되어 사형 당했다고 한다.
작은 박물관이 구석구석에 자리한 아기자기한 에딘버러
여름날의 눈부신 에딘버러도 좋지만 영국의 전형적인 흐리고 습한 날의 에딘버러도 굉장히 운치 있다.
에딘버러기차역 바로 옆 프린세스 가든.
에딘버러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폴커크 전원 마을에 자리한 제니의 집은 드넓은 초원이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진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그렇게 제니의 집에서 검은 고양이 버니를 돌보며 일주일 동안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치고, 에딘버러와 글라스고로 당일치기 짧은 여행도 다녀오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언덕을 거닐며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느낌에 행복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calendar house in scotland
이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박물관인 폴커크 캘린더 하우스 입장료는 무려 무료! 대영제국의 거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이다. 이럴 때만 대영제국이라 부르고 싶다. 건물 안에 마련된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의 카페에서는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음료와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가난한 여행자는 오렌지 주스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일주일 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니와 식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나는 다시 브라이튼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해 늦가을 남편과 단 둘이 여행을 간다는 제니의 요청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 이번엔 간병인 자격으로 제니의 아버지를 일주일간 홀로 돌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짐 돌보기(제니의 아버지 이름이 Jim 짐이다)는 내가 영국에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고 자원봉사를 하며 머문 스위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후 3개월을 제니의 집에서 짐을 보살피며 지내게 된 것이다.
제니는 틈만 나면 나와 짐을 데리고 스코틀랜드의 관광명소에 데려다주며 관광가이드를 자처했다. 미술관, 식물원, 예쁜 카페, 맛집 같은 곳에도 부지런히 다니고 한 번은 가축 경매장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한국에서조차 가보지 못했던 경매장이 신기해 눈을 크게 뜨고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경매 진행자의 알 수 없는 외계어 같은 언어 구사 능력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저게 영어인지 켈트어인지 도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제니는 용하게도 알아듣고 모녀로 이루어진 양 네 마리를 구매했는데 집 주변의 놀고 있는 초원 위의 땅도 활용하고, 누군가의 스테이크로 희생될 양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내게 입양 의사를 밝혔다. 그런 제니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받고 양이 온 다음부터 짐만큼은 아니지만 지극정성으로 양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우연히 여섯마리 모두 렌즈에 담았다.
인구수보다 양의 수가 더 많다는 뉴질랜드에 있을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양들을 바로 곁에서 접하니 너무나 신기하고 귀여워 틈만 나면 양들을 보러 풀밭으로 달려갔었다. 사람과 80~85%의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양은 목소리나 얼굴 생김새가 사람과 꽤 비슷해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 함께 있으면 기분이 마냥 좋아지고 편안해졌다. 양의 해에 태어나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 영국에서 양고기를 접했을 때부터 나는 양고기 먹는 걸 싫어했다. 그 특유의 역한 냄새도 그렇고, 먹고 나서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양을 자주 먹는 서양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과 98% 이상 일치하는 유전자를 지닌 돼지도 먹으니 할 말이 없다. 독일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인육을 요리해 먹은 범죄자는 사람고기가 돼지고기와 가장 유사한 맛이라고 인터뷰했다. 돼지가 개보다 영리하며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지능을 지녔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전 세계 돼지고기 소비량은 증가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한때 순대, 족발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음식으로 꼽던 나였지만 채식을 시작하고 동물권을 공부하며 지금은 돼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돼지고기를 끊고부터는 내가 먹어치웠던 수많은 돼지들에게 참회의 기도도 종종 하고 있다.
종이 위에 혼합재료. 노니 그림 2021. 그동안 먹은 돼지에게 미안해서 돼지그림도 그려넣은 작품
제니와 함께 살게 된 여섯 마리의 운 좋은 양들 중 네 마리는 경매장에서 데려왔고, 두 마리의 어린양들은 제니의 지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데려온 아기양 들이었는데 재밌게도 이름이 '프레디'와 '머큐리'였다.
프레디
머큐리. 양들은 사람이 만져주면 아주 좋아했다.
제니와 머큐리 프레디. 주니퍼는 제니한테 갈까말까 고민중
프레디는 하얀 몸에 검은 얼굴을 지닌 독특한 생김새를 지닌 양이었고 머큐리는 얼굴에 점박이 얼룩이 있는 양이었다. 농장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손으로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자란 프레디와 머큐리는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라 내가 가기만 해도 쫓아오며 매애~ 하며 갖은 애교를 부리곤 했다. 열심히 풀을 뜯다가도 내가 매애~ 하면 입안 가득 풀을 씹으면서 냠매애~ 하고 대답하던 재미있는 아이들이었던 프레디와 머큐리는 내가 제니의 집을 떠나 에딘버러에서 사는 동안 쑥쑥 자라 어느덧 어른 양이 되어 경매장에서 온 자기 엄마 나이의 여사님을 몇 번이나 임신시켜 제니의 집엔 새끼양 풍년이 와버렸고 제니는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양 산파가 되었다. 전직 의사였던 제니였기에 애를 받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농장 지인에게 들은 정보와 유튜브로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고 한다.
아기 양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귀여운 아가들과 아기양을 안고 있는 제니.
처음 경매장에서 엄마 양과 함께 제니의 집으로 오게 된 아기양 쥬니퍼는 처음엔 사람을 경계했지만 간식을 주며 몇 번을 유혹하자 내 손에 있는 간식을 입으로 직접 먹을 정도로 나를 따르게 되었고, 버터컵 꽃을 따다 주면 가까이 다가와 받아먹을 만큼 친해지기 시작했다.
귀여운 쥬니퍼♡
친구 프레디와 어쩌다 부녀지간이 된 쥬니퍼를 그려 넣은 그림. 왼쪽에 서 있는 아기양이 쥬니퍼.
제니가 새로운 생명들과 만나며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당시 제니의 남편이 2년이 넘도록 제니를 속여가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던 사실이 들통나며 평화롭던 제니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남편은 집을 나가 내연녀를 선택해 이혼을 요구하며 큰돈까지 위자료로 달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다. 영국에서는 귀책사유가 누구에게 있든 재산을 무조건 반으로 나누고 헤어지는 게 다반사이지만 다행히 불륜남은 그렇게 많은 걸 빼앗지는 못했고, 배신을 당하고도 남편을 사랑한 제니는 그가 뻔뻔하게 해 달라는 큰돈을 쥐어주며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던 와중 제니는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었고, 몇 년간의 길고 긴 이혼 과정 끝에 남편과는 씁쓸하게 갈라졌다.
새 남자 친구는 교편을 오랫동안 잡고 권위 있는 수학책을 출간하기도 한 지적인 미국계 학자이며 20년 넘도록 비건으로 살아온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수학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제니를 위한 시도 쓰고, 내가 글라스고에서 열린 현대미술박람회에 참여했을 때 제니와 함께 와서 그림을 보며 일반인들이 묻지 않는 디테일한 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던 호기심 많은 지성인이었다.
제니는 그렇게 새로운 남자 친구와 갓 태어난 아기양들을 함께 돌보며 전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어가기 시작했고, 비건 남자 친구의 영향을 받아 채식주의자가 되어 현재 생선, 유제품과 달걀까지 허락하는 페스코 테리안이 된 지 4년 째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남편이 바람 난 게 제니에게는 정말 잘된 일이었다. 그 당시엔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만 남편이 떠나 준 덕분에 모든 면에서 훌륭한 남자 친구를 만나 현명한 식습관으로 건강한 노년기를 보내게 되었으니 제니에겐 결과적으로 좋은 셈이다.
제니는 내가 만난 스코틀랜드 사람 중 가장 순수한 사람이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린아이처럼 웃을 줄도, 울 줄도 아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제니의 직업이었던 의사는 누군가를 돕고 보살피는 일에 적극적인 제니의 이타적인 천성과 정말 잘 맞았다. 길을 걷다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제니가 집도한 수술로 가족이 목숨을 구했다며 감사하다고 눈물 흘리며 손을 부여잡고 포옹한 적도 있었다는 일화를 들었을 땐 감동이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십 년을 해외에서 지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나다의 소설 빨강머리 앤을 읽어 본 서양인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제니는 그 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 더 사랑스러웠다. 앤과 비슷한 성품을 지닌 제니에게 한 번은 너랑 앤이랑 하는 행동이 너무 비슷하다고 하자 제니는 오히려 내가 앤이랑 완전히 똑같다며 맞받아친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빨강머리 앤의 MBTI는 INFP로 나와 같고, 아직 제니의 MBTI는 모르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녀는 ENFP임이 틀림없다. 자신 내부의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하길 즐기는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면서 감성이 앤처럼 풍부하다.
Anne of green gables
공감능력과 열린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제니처럼 나이 60에도 채식을 할 수 있다. 배우 선우용녀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채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채식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