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가 되고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게 된 약자
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저 조차도 놀라게 만듭니다. 어릴 때부터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던 저는 그저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폭식성 곰이었기 때문이죠. 채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시절엔 채식하는 사람이 이상하게만 보였고 그런 사람은 음식을 골고루 먹지 않아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없으니 분명 몸에 이상이 있을 거라 확신했어요.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골고루 잘 먹어야 건강하다."는 말은 진리일 거라 여겼으니까요.
남아선호사상이 아직 만연하던 시절 셋째 딸로 태어나 방목육아로 자란 저는 밥상 위에서 편식은커녕 애교 섞인 투정 한번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태어나던 시대에는 여아낙태를 금지하기 위해 의사가 미리 성별을 알려주는 게 불법이었고 이미 딸 둘을 낳은 엄마는 뱃속 태아가 아들이라 굳게 믿고는 몸에 좋다는 건 다 드셨다고 해요. 특히 영양탕집에서 흑염소를 고아 열심히 드셨다고 합니다(그래서 그런지 저는 염소 소리를 매우 잘 흉내 내 시골에서 흑염소가 긴가민가 하고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대했건만 출산일에 딸랑이는 쌍방울 없이 태어난 저를 보고 부모님은 크게 실망하셨다고 합니다. 친할머니의 냉담한 반응과 무너진 기대 속에 이박삼일 우셨던 엄마와 저를 안으려고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다가 결국엔 저를 예뻐하셨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 외할머니로부터 듣고 충격에 휩싸였어요. 태어나면서부터 환영은커녕 죄인이 되어야 했던 저는 착하고 순한 딸, 부모한테 원하는 것 하나 없는 딸로 있는 듯 없는 듯 잡초처럼 자라났답니다. 예전엔 덜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 슬펐지만 지금은 부모님께 감사해요. 낮은 곳에서 태어나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차별과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채식주의자가 된 후 말로만 동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동물을 지키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제가 받은 차별 덕분입니다. 동물도 지구 위에 함께 사는 생명을 가진 사회적 약자이니까요.
"나약함과 의존성은 쉽게 흔들린다는 특성이 있다. 나약하고 의존적이 되면 비밀이 늘어나고,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 커지며, 자기반성의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삶의 방식에도 개방적이고, 타인을 돕거나 타인과 소통하는 데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수나우라 테일러
"여성의 운동이자 여성해방운동인 비거니즘은 동물을 위한 싸움이자 사회에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모든 여성과 약자를 위한 투쟁이다." - 마르탱 파주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 중에서
원치 않던 셋째 딸의 탄생으로 펼쳐진 눈물바다를 뒤로하고 1년 뒤 쌍수환영속에 왕자님이 태어났습니다. 저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녔지만 남동생은 최고급 사립초등학교에 보내고, 딸들이 벌을 받고 맞을 때도 아들은 제외되었으며, 제겐 늘 찬밥을 데워주셔도 동생에겐 늘 갓 지은 밥만 퍼주고, 남동생에겐 절대 부엌일을 시키지 않는 등의 차별을 받고 자라면서도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그저 주는 거 잘 먹고, 반찬 투정 안 하고, 자식 넷 키우며 일도 하셨던 엄마의 일손을 덜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 살 때부터 젓가락질해 혼자 밥을 먹고, 다섯 살 때부터 머릴 혼자 감을 정도로 독립적이었던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요리하시는 엄마 곁에서 키친핸드가 되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기에 지금은 혼자 요리하는데 어려움이 없어 그 당시엔 정말 너무나 하기 싫었던 부엌데기, 조수 노릇을 한 걸 다행이라 생각해요. 요리 천재 엄마의 어깨너머로 배운 게 많아 지금은 굉장한 유산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깁니다. 덕분에 가공식품, 배달음식 끊고 집에서 대부분 손수 만들어먹는 채식주의자가 되기에 수월했으니까요.
주는 대로 아무거나 묵묵히 먹던 저에 비해 둘째 언니는 고기와 생선이라면 냄새난다고 질색을 해서 우리 집 편식의 여왕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지금은 고기를 먹는다네요), 집안의 왕자님이던 남동생은 육식, 특히 소시지나 베이컨 같은 가공육을 좋아해 밥상 위에 나물, 김치 같은 반찬만 있는 날엔 엄마는 먹을 게 없어 미안하다며 사죄하셨어요. 그런 두 편식인들 사이에서 아무런 관심도 못 받는 중간에 태어난 여자애가 유일하게 예쁨 받을 수 있는 길은 공부 잘하고 아무거나 잘 먹는 것뿐이었죠. 초등학교땐 전교 1등도 하며 우등상을 받고 졸업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만화에 빠져 갈수록 공부와 담쌓아 미운털이 완전히 박혔던 저로썬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먹는 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엄마가 만든 음식이라면 무조건 맛있게 먹는 게 자식의 도리라 여기고 편식하는 언니와 동생을 못됐다고 여겼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전 자신감이 없어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자존감이 낮았기에 편식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저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으려고 싫어하는 음식도 열심히 먹었던 거죠.
그렇게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음식을 잘 먹던 자존감 바닥의 잡식성 곰이 성인이 되고 집에서 나와 해외에서 십 년 넘게 살아가며 서서히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려 애쓰기 시작했어요. 아침마다 명상과 백팔배를 하며 평화와 안식을 되찾고, 영적인 성장을 계기로 그토록 환장하던 고기를 끊고(특히 돼지고기) 채식주의자로 살다 지금은 완전히 풀만 뜯는 토끼가 되어 유제품, 해산물, 가공식품도 멀리하는 순수 자연식물식으로 맑고 생기 있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식품첨가물등의 화학성분이 들어간 가공식품도 끊자 거의 모든 잔병이 사라져 건강한 비건이 된지는 만 3년이 넘었습니다. 엄격한 채식을 선호하지만 저는 철저한 완벽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음식을 나눠주거나, 여행이나 외식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동물성 식품을 먹기도 합니다.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뿐, 세상에 완벽한 비건은 없다고 생각해요.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을 걸쳐 입고 걸식을 하며 수행하셨던 부처님도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고 하셨으니까요.
식물성 식품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는 과학적 팩트를 채식 공부 하기 전까지는 몰랐기에 영양 결핍증에 걸릴까 두려워 비건이 되는 걸 망설일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태어나서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바로 비건이 된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며 지독한 편식을 시작했습니다. 나이들어 실천하게 된 채식으로 연약한 동물친구들의 목숨을 지키고 지구 환경보호에도 미약하게나마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 건강해졌음은 물론이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게 된 건 덤입니다. 채식은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나의 작은 변화가 다른 이를 변하게 합니다.
"비건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힘 있는 자의 지배를 당연시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종교와 법, 전통을 앞세워 폭력과 위협을 가하며 부당하게 권리를 누리던 집단의 특권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크리스티안 베일리
"육식을 지키기 위해 가장 열성적으로 싸우는 쪽은 남자들이다. 남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비거니즘에 대한 말이 나오는 순간, 굉장히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할 때가 많다. 이들은 고기를 먹어야 그 같잖은 정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해방운동가 메리 셸리는 문학사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인물,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 괴물이라고 잘못 지칭된 이 선량한 프랑켄슈타인은 작품 말미에서 인간의 냉혹한 면과 폭력에 거리를 두며 "내가 먹는 음식은 사람과 다르다. 나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 양을 죽이지 않고, 새끼 염소의 목숨을 빼앗지도 않는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동물을 죽이지도, 먹지도 않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인간적인 삶이라고 잘못 생각해 온 삶의 형태를 포기하고 새로운 인류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만으로도 괜찮은 생각 아닌가?" - 마르탱 파주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 중에서
"비건이 되려면 남성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폭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디스 워드 Edith Ward가 "동물권 운동은 곧 여성 인권 운동"이라고 적었듯이 남성 중심 질서는 알게 모르게 동물에 대한 남성의 패권과 이어진다. 철학자 겸 생태 여성운동가인 캐럴 애덤스가 여성에 대한 억압과 동물에 대한 억압의 구조적 관계를 파헤쳤듯이, 대다수 비건이 여성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동물 해방을 위한 운동은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서는 싸움이기 때문이다(여성은 공감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교육받아온 반면, 남성은 무디고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어져 내려온다)." - 마르탱 파주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 중에서
"동물이 인간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물과 인간을 동등하게 보면 자연히 기득권층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연대 운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면 오늘날 동물이 처한 현실의 부당함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이 땅에서 억압받는 모든 존재를 위해 싸우는 것을 우선시한다." - 마르탱 파주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 중에서
채식주의 식단보다 인류의 건강을 증진하고 지구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것은 없다. 채식은 우리의 본성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전세계가 채식주의를 채택하면 인류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 아인슈타인
아래는 동물 그림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 에서 만나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