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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Dec 23. 2022

제주도 미용실에 간 머리숱 많은 내향인

시인 겸 미용사를 만나다

나는 낯을 가리는 내향인(MBTI 검사를 해보니 INFP이다)이라 모르는 사람을 만나 머리를 온전히 맡기고  장시간 함께 해야 하는 미용실에 가는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별의별 직업 경험에 외국에서 장사도 해보고 그림도 팔 정도로 먹고살기 위해 세상에 적응하며 살다 보니 사회성이 길러져 이 나이에 낯가리고 몸을 베베 꼬며 수줍음 타는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미용실에 가는 건 내게 큰 일이다. 게다가 머리숱이 사람 머리 수준이 아닌 바야바(일반인의 거의 두세 배)라 미용실에만 가면 주로 내 돈 내고 실컷 구박받고 온다고 할 수 있어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득 안고 미용실에 간다.


 "히익!!! 어머머 이 머리숱이 이게 웬일이야~!!! 세상에! 이런 왕숱은 처음이야!"

 "이런 머리숱은 대한민국 상위 5% 안에 너끈히 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머리를 만져 본 미용사 선생님들의 부정적인 느낌이 섞인 반응은 늘 나를 따라왔다. 그럴 만도 했다. 머리를 한데 모아 자동핀을 꽂으면 머리숱을 감당하지 못한 핀이 해체돼 튕겨져 나오는 건 예사였고 머릴 묶다 고무줄 링이 끊어지는 일은 다반사다. 머리감고 말리는 건 거의 중노동이다. 드라이어를 쓰지 않고 말리면 완전히 마르는데 5시간이 넘기도 한다. 

바야바를 안다면.. 연식이 가늠된다

 서울에서만 구박받은 게 아니다. 영국에 있을 땐 내 머리를 자르며 차마 말로는 표현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던 영국인 미용사도 있었고(백인 머리카락은 얇고 가는 데다 숱도 동양인보다 적은데 두상도 작아서 나 같은 머린 난생처음이었음이 분명했다), 작년에 귀국해 제주도 표선 미용실에서 머리 할 땐 수많은 빠마 할머니들과 원장 샘, 보조, 인턴에 둘러싸여 동물원 원숭이 취급받은 적도 있었다(이곳에서 머리하고 나는 미친 과학자가 되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사연이 뽑혀 상품권을 받아 머릴 했던 강남 미용실에선 남자 미용사가 내 빠진 머리 때문에 수채 구멍이 꽉 막혔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상냥한 미용사들도 가끔 만나 좋은 얘기도 들어봤다.


 "오히려 이런 머리가 미용사로서 머리 한 보람이 있어요. 머리숱이 적은 분들 머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스타일이 잘 안 살거든요. 고객님 머린 스타일링 하기에 너무 좋고 하고 나면 결과가 좋아서 머리숱 많은 고객들이 저는 더 좋아요."


 이렇게 말한 직업정신 투철하고 긍정적인 미용사 선생님들도 계셨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여간 만나기 힘든 게 아니다. 경험상 내 머리숱에 불만을 한마디도 토로하지 않았던 분들에게서 받은 미용시술은 100% 마음에 들고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숱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아니다. 조상중에 아프리카 흑인이 계신 게 아닌가 의심될 만큼 뒷머리의 대부분은 철수세미처럼 두껍고 심한 반곱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징그러운 머릴 지금은 가슴선까지 길러 유지 중이다. 미용실 자주 안 가서 돈도 아끼고 구박도 안 받으려고 꼼수 부리는 것도 있지만 머릴 기르는 이유론 숏컷 트라우마도 있기 때문이다. 사업에 성공해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시던 아버지가 보증을 잘 못 서시는 바람에 성북구의 으리으리한 2층 집에서 서울 변두리 단칸방으로 이사와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에 살게 될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4남매를 키우며 생계를 위해 단칸방에 붙어있던 양장점에서 옷 만들고 수선하는 일도 하셔야 했던 바쁜 엄마는 어린 내 머리를 손이 안 가는 짧은 바가지 머리로 유지하시는 수밖에 없었다.


"너 남자니 여자니?"


툭하면 이 질문을 받고 나는 엉엉 울며 엄마에게 달려갔다(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울 일인가?). 그러면 엄마는 꽃과 망사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내 얼굴만큼 커다란 대왕리본핀을 머리에 꽂아 주시고 나를 밖으로 다시 내보내셨다. 어린 마음에도 여자이고 싶었는데 바가지 머리를 한 덕분에 남자로 오인받는 일이 어린 내겐 하늘이 무너지는 강도의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6살 때 이후로 숏컷은 절대 하지 않는다.



바가지 머리의 대명사 호섭이 머리. 이렇게 짧지는 않았지만 비슷했다.
숏컷 트라우마있는 머리숱 많은 내향인의 옛 작업실
교묘하게 땋으면 이 짐승 같은 머릴 위장할 수 있다. 올해 여름, 범섬 사진 찍는 내 뒷모습. 숱을 어마어마하게 쳐서 가벼워 보이지만 청학동같다


 다행히 손으로 하는 건 자신 있는 편이라 중학교 때부터 앞머리를 혼자 자르기 시작하고, 20대엔 혼자서 셀프 염색과 셀프 파마도 종종 시도해 봤으며, 역시 흑인의 피가 유유히 흐르는 것 같은 남동생의 반곱슬 머리에 언니와 달라붙어서 매직 스트레이트를 해주기도 했다. 영국에서 반년을 함께 산 호스트할머니의 은발머리를 잘라드린 적도 있었고, 코로나로 미용실에 가지 못하던 전 남자 친구의 머리도 꽤 멋지게 잘라 코로나 이후 들른 미용실에서 단골 미용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레이어드로 자르라고 당당히 요구하시던 할머니

10년의 해외 거주 기간 동안은 웬만하면 스스로 머리를 관리해 '야니'나 '전인권' 머리 일 때도 있었다. 머리 하는 비용도 우리나라의 두세 배는 비쌌고 한국인들이 외국인 미용사에게 머릴 맡기고 나서 호섭이가 되거나 절망한 걸 많이 봤기 때문에 외국에서 미용실 가는 건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에 웨이브 파마를 하고 몇 년을 버티기도 했다.


뉴에이지 작곡가 야니와 전인권. 둘 다 범상치 않은 머리를 가졌다


 프로필 사진의 머리도 내가 직접 자르고 스타일링 한 머리다. 밤에 머리를 감고 물기가 살짝 남게 말린 후 양갈래로 땋아서 자고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굵은 웨이브가 생겨 우아한 구불머리가 연출된다.  


 작년 말에 정착한 제주도에서도 대충 묶고 살며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살다가 제주도민에게 지원된 나랏돈 십만 원을 받자마자 머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봄에 한번 들른 동네 미용실에서 나의 미친 과학자 같은 머리를 과감히 숱 치고 다듬었지만 여름이라 질끈 묶고 방치하며 살다 도저히 이렇게 자연인처럼 못살겠다 싶어 매직 셋팅 파마를 하러 가기 위해 미용실을 검색해봤더니 리뷰가 괜찮은 미용실이 있었다. 물가 비싸기로 소문난 우리 동네 미용실보다 반값이고 편안하게 대해주며 머리 잘하시는 어떤 선생님에 대한 리뷰가 압도적으로 많아 그 선생님으로 예약하고 지난 10월 말 햇살이 좋던 어느 날 오전에 버스를 타고 갔다.


 남자분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숏컷을 하신 중년 여성분이셨고 굉장히 편하게 대해주셔서 부담스러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여행으로 태국에 간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태국에 관한 정보도 알려주셨다. 내가 불자라서 태국에 절이 많아 좋다고 하자 미용사님도 불자라고 하시며 온몸으로 반가워하셨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선생님과 열정적으로 부처핸섬을 외치다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범상치 않은 분임을 느끼게 되었다.


육지에서 수많은 사업을 시도하고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에 정착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지 5년이 된 선생님은 알고 보니 시를 쓰는 분이셨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시를 종종 써서 올려놨는데 어느 순간 그게 다 사라졌다고 해서 속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꼭 작가 신청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렸고 언젠가 시집을 내실 수 있기를 염원해 드렸다. 선생님은 온 가족이 함께 시집을 내기 위해 요즘 다 같이 시를 쓰는 게 숙제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하루 종일 서서 남의 머리 만지는 일도 대단한 일인데(12시간 근무!) 짬을 내어 아름다운 시까지 쓰신다니 너무나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시는 예술가 선생님 아니신가! 시도 쓰면서 다양한 책도 즐겨 읽는 선생님께 어떤 고객이 선물로 준 책 '법구경'을 가져와 보여주셔서 잠시 읽어보니 정말 좋은 구절이 많은 책이었다.


만약 우연히 당신을 험담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깟 험담쯤이야. 옛날에도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없겠어'라며 넘겨라. 사람들은 말수가 적은 사람은 '무뚝뚝하다'라고 비난하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시끄럽다'며 비난한다. 적당히 말하는 사람조차 '뭔가 꿍꿍이가 있다'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으려 하고, 억지 이유를 찾아내 남을 헐뜯으려 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법구경 중에서.


머리숱이 많아서 비난받았던 나는 미용사들이 짜증을 내는 것에 마음이 쓰여 미용실 가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고 내 머리털을 미워하며 자괴감에 빠졌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물 흐르듯 맡기면 살아가는 게 편해진다는 걸 어릴 땐 몰랐기에 사는 게 지금보다 괴로웠다.


현실을, 세상을,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고, 사랑해 주고, 지금 이대로 존재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 아무것도 아닌, 할 일 없는 무위행이야말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단 하나의 실천 아닌 실천입니다.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에서



미용실에서 머리 하며 좋은 책도 읽고 같은 종교인도 만나고 이렇게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극구 말렸지만 선생님께서 자진해 2만 원이나 깎아주셔서 저렴한 가격으로 머릴 한 것도 감사했다. 파마한 결과도 좋아 바야바 상태에서 벗어나 머릿결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찰랑거린다. 머릴 하고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내 머린 여전히 마음에 든다. 선생님이 쓰신 시를 곧 브런치에서 읽을 날을 기다린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보이고 싶다'라고 생각해 머리스타일을 바꾼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화려하게 장식한 상품을 팔듯 자신을 멋지고 비싼 옷으로 휘감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면에 추잡한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아름다운 겉모습만을 봐달라며, 겉치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 법구경 중에서




2011년 호주에 있을 때 멋진 사진을 보고 습작해 본 긴 머리 여자들 그림. 한지 위에 수채, 말린 꽃잎.


머릴 말아 올려 묶으면 세상 편하다. 초생달 티타임. 미니 캔버스 위에 아크릴.  2012년


가장 좋아하는 머리스타일을 지닌 요정. 종이 위에 수채, 잉크. 노니 그림


외국에서 만난 다양한 헤어스타일의 사람들. 종이 위에 연필, 색연필 그리고 수채. 노니 그림


꽃그림 전문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꽃그림 모음. 노니 그림

더 많은 그림 보러 놀러 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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