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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Sep 02. 2020

뉴질랜드에 입양된 나의 자식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이뤄진 첫 그림 판매와 외국에서의 첫 전시 이야기

공항에서 마저 출국을 말리는 부모님께 그림 팔고 오겠다고 큰소리치며 미술 알바로 번 쥐꼬리 만한 돈을 가지고 무작정 뉴질랜드로 떠났던 2007년 11월.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던가요. 참으로 무모했던 이십 대의 제가 젊음 하나 믿고 도전한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하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눈호강 제대로 했던 나날들
극도로 새파랗던 하늘 아래 싱그럽게 핀 장미들. 헤글리 공원 장미 정원과 아트센터 부근 어느 갤러리에서
작은 내 방에서 바라 본 노을 지는 저녁 하늘과 밀짚모자와 그림으로 소박하게 꾸민 벽면의 모습
관광객을 위한 귀여운 구식 트램이 지나다니던 크라이스트처치 시내

비행기에서 내려 생애 처음 받은 남반구의 기는 포근하고 따뜻했습니다. 온도도, 사람들도, 햇살도 그저 따사로웠어요. 크라이스트처치는 천국 같았고, 낯선 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던 맨발로 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천사 같았죠. 모든 것이 마냥 좋았고 이런 온화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면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듯했어요. 


'그림이 잘 그려질 것 같은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오 영감이 몰려온다!! 가져온 그림도 다 팔아야지!'

'그래 웬만하면 여기서 뼈를 묻자. 내 운명의 땅, 나를 위해 존재하는 땅 뉴 질 랜 드!'


 뉴질랜드가 너무 좋았습니다. 첫 알바에서 잘리기 전까지는..


"쑹이 초이, 당신은 우리 호텔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트라이얼에서 결과가 안 좋았고, 결정적으로 당신이 일했다던 영국의 코랄 게스트 하우스는 전화해봤으나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처음으로 일을 시도한 호텔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돈이 당장 떨어지려는데 일을 하지 말라니요.. 트라이얼이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잘린 건 아니지만 김칫국 마시기의 대가인 저는 이미 그 호텔에서 받은 급여로 미래 계획을 다 짜 놓았던 터라 그 전화를 받고 까무러치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것입니다. 꼬장꼬장한 말투의 매니저에게 이건 unfair 하다, 나는 거짓말한 적 없고 최선을 다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비굴하게 매달렸지만 얄짤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 머릿속이 새하얘졌어요.


'뭐부터 해야 하지?'


비가 올 것처럼 날씨는 꾸물거렸고, 잔뜩 낀 먹구름처럼 내 마음도 먹먹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그림을 넣어둔 포트폴리오 백을 챙겨 일단 동네에서 제일 큰 그림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저돌적으로 그림을 보여주려 갤러리로 들어간 적은..(영국에서도 못해본 짓) 당장 생계가 달린 문제니 없던 용기가 용암처럼 내 안에서 솟구쳐 꿈틀꿈틀 흘러나왔습니다. 상냥하고 조각같이 생긴 그림 가게 아저씨는 제 그림을 찬찬히 훑어보시더니 크라이스트처치 아트센터로 가보라며 적극 추천해 주셨고, 그 말에 큰 용기를 얻어 50분을 걸어서 (버스비조차 아껴야 했던 극빈층의 삶) 아트센터로 돌진했죠.


아트센터는 작은 미술관 여러 개가 모여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단 1층부터 접수하기로 하고 들어가 갤러리 주인으로 보이는 은발 할머니께 제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들이댔습니다. 흔쾌히 ok 하신 할머니는 두 손바닥을 마구 비비시며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눈까지 반짝이셨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보여드릴 때마다 할머니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급기야 침까지 튀기시며 그림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Fantastic! Absolutely beautiful!"


땡큐 땡큐...!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입이 귀까지 걸려 헤헤거리는데 할머님 덧붙이시기를


"BUT, 나는 이 갤러리 주인이 아니에요. 오늘만 주인 대신 봐주는 거랍니다."  


'오 마이 갓!!! 뭐라고요 할미냄?!'


신이 나서 입이 조커가 되어있던 저는 실망을 금치 못해 입꼬리가 급격히 주저앉아 내려왔고, 주둥이가 댓 발 나오던 찰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이 갤러리 주인은 월요일에 나오니까 그날 다시 와서 그림 보여주고 만약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내 갤러리로 꼭 오세요. 갤러리는 위층에 있어요. 나는 당신 그림으로 뭔가를 꼭 해야겠으니 기대하고 와야 해요!"


명함을 주시며 웃어주시던 로레인 퀸 할머니는 알고 보니 제일 높은 직급의 미술관장 님이셨어요! 할렐루야~

제 그림을 좋아한 첫 번째 뉴질랜드 사람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전시회가 열릴 것 같은 기쁜 예감에 부푼 가슴을 안고서 다시 일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월요일,

아침잠을 마다하고 아트센터가 문 여는 시각에 맞춰 다시 한번 그 갤러리로 입장을 했습니다. 갤러리의 진짜 주인은 그림을 보자마자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로레인 퀸에게 가보라고 했고, 저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어요.

 

'괜찮아, 내겐 그 할머니가 있으니까.'


Gallery O.


명함에 적혀있던 그 갤러리 오에 다다르자 은발의 할머니가 금발의 여인과 리셉션 데스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웃으며 다가가 인사부터 했어요.


"Hi! 저를 기억하세요?"


두 여인의 눈은 커졌어요.


"Sorry?"

"(어리둥절) 저 모르세요? 지난 금요일에 제 그림 보고 좋아하셨잖아요. 저더러 꼭 다시 오라고 하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누구세요?"


로레인 퀸은 마치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저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죠.


'이 할머니가 불과 사흘 전 일을 홀랑 다 잊을 만큼 연로하신 겐가? 아님 그 사이에 치매에 걸리셨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그림을 보고 침 튀어가면서 호들갑 백 프로의 리액션을 펼치셨던 분이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는지...  로레인 퀸의 명함을 꺼내어 보여드리며 다시 한번 여쭈었습니다.


"로레인 퀸.. 아니세요?"


두 여인은 너무나 황당해하며 로레인 퀸 사무실은 저 건너편에 있다고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어요. 응?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 여인은 할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젊었고, 로레인 퀸처럼 짧은 머리였지만 검은 머리가 더 많은 세미 은발의 50대 아줌마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년 여인을 70대의 주름 자글자글한 은발 할머니로 착각하는 대실수를 범하다니..


'나는 정말 눈을 어디다 달고 사는 인간인가..!'


쏘리쏘리 쏘 쏘리를 연발하고 돌아섰지만 그때 등에 꽂히던 그 따가운 시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백인은 왜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요? (사실 같은 한국인도 종종 못 알아봅니다. 안면 인식 장애까지는 아니고 남의 얼굴에 별 관심이 없나 봐요..) 그렇게 한 중년여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뻔뻔함을 장착한 후 바짝 긴장한 채 '진짜 로레인 퀸'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똑똑.

 

"컴인~"


사무실은 미술관장님 사무실답게 크고 고풍스러웠습니다. 로레인 퀸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그림을 다시 한번 보시며 여전한 리액션을 펼치셨어요.

 

"전시할 날짜를 확인해 봐야겠네요. 5월까지는 바쁘니까 6월에 전시 어때요?"


꿈을 꾸는 듯 한 기분이었어요! 제 그림을 전시한다고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 아트센터에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생면부지 외국인에게 그림 하나만 보고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로레인 퀸은 친절하게도 표구까지 도맡아 주문하시겠다며 그림들을 조심스레 챙기셨고, 그림을 받았다는 증서까지 꼼꼼히 작성해 건네주셨습니다.


영국에서 그린 아기 고양이. 종이 위에 수채 및 아크릴 물감 2005
뉴질랜드 산 체리를 거금 주고 사 와서 직접 보고 그렸습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침 삼켜가며 그린 그림이라 볼 때마다 눈물 나는 빈곤층 시절 작품. 종이 위에 수채 2007
영국에서 찍은 수국 사진을 참고하여 한국에서 그린 작품. 종이 위에 수채 2007

그렇게 해서 아기 고양이, 체리 요정, 수국 꽃 세 점의 자식 같은 그림들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2주간 전시를 하게 되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저는 그 역사적인 전시회에 갈 수 없었어요. 낮엔 옷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밤엔 그림을 그리며 바쁘게 지내다 생일인 3월 11일,  갑자기 온몸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죠. 단순한 몸살이겠거니 진통제로 일주일 넘도록 버티면서 일하다 정신력의 한계를 느끼고 결국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심각성을 느끼고 절 강제 입원시켜버렸습니다. 병원에서 푹 쉬다 갈 줄 만 알았더니 응급실에서 이틀간 사경을 헤매고 옮겨진 중환자실에서 홀로 몹쓸 역병 (병원의 모든 의사들을 총동원해 매일 온갖 검사를 실시했지만 결국 무슨 병인지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고, 바이러스 문제 같다고만 얼버무린 걸 보면 그 당시 없던 신종플루나 조류독감 같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대를 앞서 나간 중증 환자였죠)과 사투를 벌이다 열흘 후 기적처럼 퇴원하고 아쉽지만 뉴질랜드에 온 지 넉 달만에 모든 걸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죠. 부모님이 너무나 걱정하셨고 특히 병상에 있는 동안 엄마의 음식이 미친 듯이 그리웠기 때문에 다 놓고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같이 살던 플랫 메이트들이 대신 전시회에 가서 사진도 찍어 보내주고, 로레인 퀸 관장님께서 세 점의 그림들을 직접 사주시는 행운을 얻었기에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마무리였습니다.


슬프게도 2011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크라이스트 처치는 전처럼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많은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지진이 적은 북섬으로 이사를 갔고, 역사적인 건물들이 무너진 후로 오랜 기간 동안 복구작업을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수까지 터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라는 키위 친구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어요. 생각해보니 그때 중병에 걸리지 않고 그대로 크라이스트 처치에 남았더라면 저도 지진을 겪고 그림들과 함께 묻혔을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병원에서 앓을 당시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지금은 죽다 살아난 덕에 덤으로 사는 삶이라 여기며 예전보다 긍정적으로 살아가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그 호텔 매니저에게도 고마워요. 가차 없이 잘라준 덕분에 그림을 팔 수 있었으니까요.


 




전시회에 가서 사진 찍어 이메일로 보내 준 착한 플랫메이트 게로드.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매일같이 문병을 와 준 고마운 아일랜드 친구입니다.


노니의 그림세상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 에서 구경하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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