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어장 속 수많은 물고기들 중 한 마리였다
우리 집에서 라면을 먹고
뜨거운 밤을 보낸 후
연락이 없는 그가 궁금해져 찾아가 보니
그는 수많은 암컷들과 함께였다.
"갑자기 웬일이야?"
"... 저 파란 줄무늬 누구야?"
"전여친."
"저 점박이 물고기는?"
"여사친."
"그럼 나는? 나는 뭔데 너한테? 우리 무슨 사이야?"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 몇 번 만나 논거 가지고 되게 질척대네.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했니, 우리가 결혼을 했니?
드럽게 예민하네. 좀 쿨해질 수 없어?
스토커도 아니고 불쑥 찾아와서 왜 이래?"
그렇게 상냥하고 잘해주던
그가 180도 변해버렸다.
나를 볼 때 꿀이 뚝뚝 떨어지던 그의 눈빛은
초점 잃은 뿌연 동태 눈깔로 둔갑했고,
그에게 공주대접받던 나는
순식간에 무수리로 전락해버렸다.
몰랐었어.
나는 너의 어장 속 수많은 물고기 중 한 마리였구나.
이렇게 우린 끝나버리는 걸까?
운명이라 생각했던 그와의 오글거리던 썸 타기가
드디어 끝나고
(연애세포가 현저히 부족한 인간에게 사랑놀음 그림 그리는 행위는 흡사 가벼운 고문과도 같았음. 너무 오글거리고 간지러워서.. 그러나 계속 연재할 예정. 셀프 고문 크헉)
카사노바 장어의 실체가 드러나며
미련 많고 순진한 인어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림 재료: 파브리아노 아띠스띠꼬 Fabriano Artistico 세목 수채화지, 홀베인 Holbein 수채물감, 파버 카스텔 Faber-Castell 수채색연필, 루벤스 Rubens 붓, 홀베인 Holbein 잉크, 니코 Nikko 펜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