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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Oct 14. 2021

스위스에서 잃어버린 엽서를 한국에서 찾았다

스위스 숭배자가 된 계기

처음 스위스에 발을 디딘 건 2005년 가을이었어요. 영국에서 1년을 그림 그리며 거지처럼 살다 한국에 가기 싫어 프랑스로 도망가 한 달 반을 지내고 있을 때 한국에 있던 언니가 짧은 유럽여행을 같이 하자며 합류했고, 우리는 로마에서 만나 베니스, 로잔과 리옹을 거쳐 파리에서 함께 귀국하는 일정을 짜고 유로스타로 그 힘들다는 기차여행을 일주일 넘게 시도했습니다.


젊은 날의 혈기로 힘이 넘치는 20대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꿈도 못 꾸는 기차여행이에요. 목디스크 걸리기 십상인 3층 침대가 빼곡히 들어찬 침대칸이 있는 기차에서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조마조마한 밤도 보내고(베개 밑에 지갑을 두고 잤고, 다행히 한국인이 많은 기차 안이라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호그와트로 학생들을 실어 나르던 그 품위 있는 기차와 꼭 같던, 밤색 문이 칸마다 달린 기차에서는 마치 해리포터가 된 듯 낭만에 부풀어 로마에서 산 싸구려 엽서에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목가누기 힘든 침대칸에 구부정히 앉아있는 언니와 엽서쓰던 나. 16년 전이라 심히 촌스럽다. 흑역사


제가 업어 키워 너무나 그리워하던 한국에 있는 조카에게 정성 들여 엽서를 쓰고 주소까지 적은 뒤 스위스에서 내리면 우체국에 들러 부칠 생각으로 그 당시 메고 있던 크로스백 앞 주머니에 엽서를 넣고서 로잔 역에 내려 비 오는 스위스의 가을 정취를 느끼며 처음으로 밟아 본 청정국의 깨끗하고 정돈된 매력에 흠뻑 취해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같은 유럽 땅에 자리 잡고 있지만 프랑스, 이태리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지닌 스위스의 신선함에 푹 빠져 묘한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였어요. 뭔가 더 깔끔하면서 잘 정돈된 느낌에 우아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의 귀여움도 더해진 데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까지 선보이던 고품격 선진국 스위스. 한껏 들떠 열심히 거리 사진을 찍고 기념품 가게에 들러 그 유명하다는 스위스 초콜릿과 조카에게 선물할 인형, 사촌언니 결혼선물로 줄 벽시계를 사고 너무나 친절하고 유쾌했던 주인장과 기념사진도 찍은 뒤 우체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호객행위의 달인이었던 스위스 기념품가게 주인아줌마. 가게에서 나와 정신차려보니 수많은 물건들이 손에 들려있었다. 아뿔싸


우체국에 도착해 엽서를 꺼내려고 가방 앞주머니를 열자 아무리 뒤져봐도 엽서가 보이질 않았어요. 가방에서 뭘 꺼내다 같이 딸려 나와 나도 모르는 사이 길바닥에 떨궈진 게 틀림없었죠. 흔들리는 기차에서 두통 참아가며 그렇게나 열심히 썼건만...


안타깝게도 엽서는 끝내 찾지 못하고 시간이 되어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로 가는 기차에 올라야 했어요. 일주일 동안의 짧은 유럽여행이라 당일치기로 잠시만 들렀던 스위스였기에 살짝 아쉬움이 남아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12년 뒤 세 번 더 방문해 총 5개월 동안이나 아름다운 스위스에서 꿀 빨며 머물렀다니 인생은 정말 살고 볼 일입니다.


그렇게 유럽여행을 마치고 샤를 드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와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방출했어요. 누구보다 나를 반겨준 조카에게 스위스에서 산 인형을 안겨주자 신이 나 방방 뜁니다. 이 인형을 산 곳이 스위스인데 그때 너에게 쓴 엽서는 그만 잃어버렸다고 하자 조카가 내손을 잡아끌고 자기 방으로 가 뭔가를 보여주었어요. 바로 제가 잃어버린 그 엽서였죠! 놀랍게도 우표가 붙여져 있고 스위스 직인 찍혀있었습니다.

"난 엽서 받았는데? 이모가 이거 보낸 거 아니었어?"

정신 놓고 다니다 흘려버린 엽서를 누군가가 길에서 발견하고 친절하게도 우표까지 직접 사 붙여서 한국으로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감동으로 전율이 돋고, 온몸이 희열을 느끼며 짜릿했어요.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스위스 쪽으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분 입장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글씨인 한글로 가득한 종이쪼가리였을텐데(영어라곤 SOUTH KOREA 뿐이었죠. 나라명 빼고 주소도 한글로 썼기에..) 선뜻 베푼 아름다운 선행에 감동받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천사가 아니면 누가 천사일까요? 그분 아니었으면 길바닥에서 낙엽처럼 나뒹굴다 쓰레기 신세가 되었을 엽서였겠죠.


나였다면 어땠을까요? 서울 한복판에서 길 위에 뒹굴던 외국인이 쓴 당최 읽을 수도 없는 글씨로 채워진 엽서를 발견하면 과연 저는 그걸 주워 우표를 내 돈 주고 사서 붙이고 시간을 내 직접 부쳐주었을까요?

지금의 저라면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분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지만 16년 전의 철없고 이기적이었던 저라면 절대 못할 거예요. 그냥 못 본 척 지나쳤을게 뻔하겠죠. 지금 생각해도 그저 고맙고 신기한 일이라고만 생각되는 그 사건으로 저도 그분처럼 그렇게 베풀며, 남을 존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왔습니다. 아름다운 가르침 주신 무명의 스위스 천사님은 그 예쁜 마음 여전히 간직한 채 살고 계시리라 믿어요. 맛있는 퐁듀와 초콜릿을 먹으며, 요를 레히~ 요들송 부르며 행복하시길.


출처 : https://www.blissquote.com/2019/07/angel-quotes.html
종이 위에 혼합재료. 노니 그림 2021. 엽서쓰는 소녀는 아니지만 꽃 위에서 책 읽는 요정과 여러 동물들.



추신-

그때 스위스에서 온 인형과 엽서를 받고 좋아하던 조카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모델의 꿈을 키우며 아름답게 성장했고, 지난여름 미스코리아 예선에서 어느 지역 진으로 뽑혀 우리 집안 첫 미인대회 본선 진출자가 되었어요. 서울대 출신의 외사촌과 친사촌이 있는 게 유일무이한 가문의 자랑이었지만 미인대회 출신은 처음이라 집안의 경사였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미인대회가 비난받는 추세이고 저 역시 성상품화를 좋은 시선으로 보진 않지만 사랑하는 조카가 미스코리아가 되었다니 그저 기쁘고 웃음만 나오네요. 역시 가재는 게 편인가봐요. 가방끈 짧고 다리도 짧은 이모라 가문의 영광이 된 적은 없지만 조카의 희소식에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표지 사진 출처 : https://www.thetimes.co.uk/article/a-weekend-break-in-lausanne-switzerland-l0sckx8q0


더 많은 그림이 보고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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