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로부터 처음 전화받았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통화 직전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켠 듯 걸걸하고 몹시 터프한 여자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했지만, 발리로 온 가족이 6주간 여행을 떠난다며 내게 고양이들 임시 집사로 와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던 키위 여인(뉴질랜드 사람을 Kiwi라고 부름)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져 인터뷰에 응했다.
내가 잠시 머물던 아파트 앞까지 직접 픽업을 온 애니는 실물을 보니 목소리만큼이나 여전사 같은 외모에 금발머리를 한 젊고 섹시한 주부였고, 차에 오르자 애니의 딸들인 세명의 꼬마숙녀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티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자리한 그녀의 집은 나무로 사방이 둘러싸인 아름다운 언덕마을의 가장 아래쪽에 자리 잡은 4층짜리 목조주택으로 이 동네에서 가장 아늑해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자세히보면 두마리의 고양이가 보인다.
딸만 셋 둔 이 젊은 부부의 북적이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두 마리는 아이들의 손길과 육아에 지쳤는지 우리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내 어딘가로 새침하게 가버렸다. 반지하인 주차장까지 도합 4층인 집안 곳곳을 소개해주던 애니는 내게 앞으로 내가 돌볼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 사료를 절대 먹이지 않아요. 사료는 주로 소고기로 만들어지니까요. 고양이에게 소를 먹이다니 당찮다고 생각해요."
꽤 지적으로 보이는 애묘가의 말이었다. 그땐 그저 사료가 맛없게만 보여서 늘 시리얼만 으적대는 대부분의 고양이들이 가여울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 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고 애니의 결정이 현명했음을 인정한다. 알고 보니 사람이 먹지 않는 가축의 부위(부리, 발, 깃털, 눈알, 발굽, 뼈, 내장)뿐만 아니라 안락사당한 개와 고양이, 그리고 로드킬 당한 동물들, 동물원에서 죽은 동물들, 병에 걸린 가축의 사체까지 갈아 화학 방부제와 인공색소까지 넣어 만드는 게 대부분의 저가 사료이다.
애니는 뒷마당을 보여주며 자기가 키우던 토끼 이야기를 해주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던 바니를 뒷마당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어리고 예쁜 것을 다른 집 고양이가 죽여서 피범벅으로 만들어 죽여놨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 소름 끼치는 장면에 애니는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자세히 물으면 괴로워할 것 같아 더 묻지는 않았지만 고양이가 토끼장에 쳐들어 간 건지 아님 뒷마당 풀밭에 토끼를 풀어놨었는지 궁금해졌다. 그 살육의 현장이었던 토끼장은 아직도 뒷마당 응달 한편에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날 애니는 내게 집 열쇠를 쥐어주며 6주 동안 고양이들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6일 후 두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애니가 이메일로 보내준 지침서에는
-고양이에게 아침, 저녁으로 냉동실의 고기 한 덩이나 통조림을 하나씩 줄 것.
-쓰레기통은 매주 수요일에 내놓기.
-세탁기 및 티브이 사용법 등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고양이에게 먹이 줄 시간이 되어 냉장고를 열어 고기를 꺼내본 나는 놀라고 말았다. 고기를 싼 비닐팩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Rabbit and heart
토끼...! 그것도 토끼 심장까지 함께 믹스된 고깃덩어리였던 것이다.
'아... 핏물이 흥건한 이 토끼고기가 저 귀여운 고양이들 주식이구나.. '
한때 토끼를 사랑했지만 소중한 고양이를 위해 아낌없이 토끼고기를 비싼 값에 들여와 제공하는 애니의 특이한 동물사랑이 흥미로웠다. 내 정서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 돌보던 두 마리의 고양이들
말리 : 순하디 순한 검은 고양이. 햇볕에 비치면 갈색 털이다. 항상 두 눈을 꿈쩍꿈쩍. 육중한 몸을 가누기 힘들어 점프는커녕 배 뒤집기도 못한다. 욕심이 없어 먹이를 먹다 루카에게 빼앗겨도 옆으로 나와 가만히 보고만 있다. 노묘 공경인가.
루카 : 앙칼진 암고양이. 15년 이상 살았다니 고양이 세계에선 할머니나 다름없어 걸을 때도 천천히 걷고 누웠다가 일어날 땐 전형적인 할머니 같다가도 한창 어린 말리를 상대로 텃세 부리고 노욕 부리는 꼴이 얄미웠지만(나도 거대 고양이라고 여겼는지 엄청 혼을 냈다) 늘어지게 자는 모습은 마치 토끼 같아 귀여웠다.
토끼같은 루카. 그러나 절대로 만질수도 만져서도 안되는 G랄냥
애니의 첫째딸 소피아의 초상화를 선물로 그려 주고왔다
뉴질랜드에서 지내던 2013년-2014년에 기록해둔 노트를 참고해 쓴 글입니다. 충격적이지만 재미있는 실화들이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